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1부-조선시대 의료 <2>조선의 대민 의료정책

임금 질책 피하려 질병·사망 기록 축소 보고…예방 기회도 포기

초기 동산병원을 찾은 어린이 환자의 모습.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모호했던 시절, 어린이들의 모습도 이러했으리라.
초기 동산병원을 찾은 어린이 환자의 모습.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모호했던 시절, 어린이들의 모습도 이러했으리라.
대구 인근 난민촌으로 짐작되는 풍경. 시기는 1950, 1960년대로 추정된다. 멀리 뒤쪽에 마을이 보인다.
대구 인근 난민촌으로 짐작되는 풍경. 시기는 1950, 1960년대로 추정된다. 멀리 뒤쪽에 마을이 보인다.

조선의 역사는 끝없는 기근, 전염병과의 사투였다. 도(道) 단위에서 병이 돌면 수백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릴 때면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몰살했다.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과연 이런 기록들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얼핏 짐작하기에도 당시의 피해 상황이 실정에 따라 그대로 기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 지역 관리들도 어떻게 해서든 피해를 축소해 보고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실록의 질병 사망기록도 축소 보고돼

앞서 조선에 몰아닥친 전염병의 참상을 보여주는 '현종실록'의 기록(현종 12년'1671년 2월 29일) 중 일부를 보았다. 뒷부분에는 이런 내용도 담겨 있다.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賑救: 흉년을 당해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계문(啓聞: 신하가 글로 임금에게 아뢰던 일)한 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이 글에 따르면 조정에 보고된 피해는 실제의 10~20%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18세기 초'중반에도 역질의 공포는 여전히 조선을 뒤흔들었다. 1733년(영조 9년) 전라도에 역질이 돌아 2천81명이 죽었고, 1741년(영조 17년)엔 관서지방에서 역질로 3천700명이 몰살했다. 1750년(영조 26년)에는 전국에 역질이 돌았다.

'이 때에 팔도에 역질이 성하여 죽은 자가 즐비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영조는 하교를 내렸다. "시신을 묻어 주는 것은 왕정(王政)의 큰 일이다. 더군다나 경외에 역질이 치성하여 사망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중략) 죽은 자는 방법을 다해 거둬 묻어주고 산 사람은 특별히 구원해 살려내게 하라." 죽은 자가 워낙 많이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음을 통탄하고 있다. 산 사람을 구원하라고 하명했지만 망자의 수는 급격히 늘어만 갔다. 이 해 영남지역 사망자만 1천933명에 이르렀다.

◆대민 의료기관의 역할은 미미

임금이 통탄하며 백성의 생명을 살리라고 하교했지만 그 명(命)은 한낱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보편적 의료'는 요원한 상태였다. 이는 비단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중세와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 전염병이 돌 때마다 가히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염병 원인균 발견과 백신 개발은 20세기에야 이뤄졌다.

조선은 개국 직후 내약방, 전의감,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생원 등 국립의료기관을 만들었다. 이들 기관은 모두 한성에만 있었다. 내약방과 전의감은 궁궐이나 근처에, 혜민국은 궁궐과 멀리 떨어진 도성 안에, 대비원은 도성 밖에 있었다. 이후 내약방은 내의원으로, 혜민국은 혜민서로, 대비원은 활인서로 바뀌었다. 내의원은 임금의 약을 만드는 기관이고, 전의감은 궁궐 내 약재의 공급이나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곳이다. 이들 기관의 의료 혜택은 왕실과 고급 관료에만 국한됐다.

백성들을 치료하는 기관은 혜민서와 활인서였다. 혜민서는 주로 백성의 질병을 돌보았다. 활인서는 주로 떠돌이 병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돌면 임시 병막(病幕)을 지어 환자를 간호하고, 환자가 죽으면 묻어주는 일도 맡았다.

부산대 강명관(한문학과) 교수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런 기관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 이런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에 지방의료기관이란 항목이 있기는 하다. 태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기간에 지방에 의원(醫院), 의학원(醫學院)을 두고 의원(醫員)을 파견했다지만 이 기관들은 뒷날 종적이 묘연하다. 조선시대 지방에는 서울의 혜민서와 활인서 등에 필적하는 공식적 의료기관이 부재했던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적고 있다.

◆지방 의료는 사실상 전무한 실정

그렇다면 조선에는 얼마나 많은 의료인이 있었을까? 이를 알려주는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경국대전'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적 규정과 행정 규모를 알려주는 자료에서 서울과 지방의 의관(醫官) 규정을 찾아볼 수 있다.

1866년에 편찬된 '육전조례'에 따르면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 소속된 현직 의원 수는 '의관, 의서습독관, 의학생도, 의녀'를 합쳐 250여 명 정도였다. 지방의 경우, 혜민서에서 파견한 심약과 지방 관아 의원, 의생 등이었다.

심약은 종 9품 외관직(外官職)으로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조사하기 위해 각 도에 파견된 잡직(雜職)이다. 전의감과 혜민서 의원 중에서 임명했는데 경상도'함경도에 3명씩, 충청도'평안도에 2명씩, 경기도'전라도 등엔 1명씩 두었다.

약부도 있었다. 하지만 약부는 약재 채취에 동원된 인력일 뿐 의술이나 전문적인 약재 지식을 배울 기회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지방의 의원활동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다만 의생과 심약을 통해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이들이 기초적인 의료인 역할을 맡았다고는 해도, 인원수로 미뤄볼 때 백성에 대한 의료는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카이스트(KAIST) 신동원(인문사회과학과) 교수는 이렇게 밝혔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역의 규모에 따라 부(府)에는 의생을 16인, 대도호부와 목(牧)에는 14인, 도호부 12인, 군(郡) 10인, 현(縣) 8인을 두도록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대략 3천여 명의 의생이 지방에 존재했다. 하지만 법전의 규정은 이상적인 것을 적은 것일 뿐, 실제 상황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글을 통해 "의학적 치료는 도시에서나 가능했고, 시골은 주술(굿)과 '경험방'(經驗方: 전문적인 의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익힌 치료법)의 땅, 기껏해야 '돌팔이'(돌아다니며 물건이나 기예를 파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물건과 기예를 믿을 수 없는 사람) 의사가 간간이 출몰하는 땅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상주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원이나 다수의 환자를 수용해 치료하는 병원이 도시의 핵심 시설로 등장한 것은 개항 이후"라고 밝혔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사진 제공=계명대 동산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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