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아파트 창밖으로 지평선이 보인다. 여명(黎明)의 안개 때문인지, 붓으로 붉은 색을 칠했을 때 번진 것처럼 경계가 불확실한 핏빛이 퍼져있다. 날이 밝기를 더하자 한 지점이 더욱 붉어지더니 손톱 모양의 붉은 것이 머리를 내민다. 반달 모양이 되었다가 둥근 해가 닭의 꽁무니에서 알이 쑥 빠져 나오 듯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다. 탄생이다. 모든 태어남은 0인 모양이다.
서산으로 해가 진다. 낙조의 빛은 아침 해의 후광보다 더 붉다. 희망이 탄생과 성장의 빛에 섞여 핏빛이 희석되지만 저물어감과 소멸은 자신을 불태운 한(恨)의 빛이 첨가되어 더욱 진한 색이다. 지는 해도 역시 0이다.
탄생의 환희와 소멸의 아픔이 모두 0을 만든다. 0은 존재가 발아하는 근원이며 존재가 돌아가는 궁극이다. 그렇지만 하루의 아침과 저녁이 한 바퀴 돌았다고 하여 끝난 것이 아니다. 하루는 영원히 계속된다. 0은 없음이 아니라 무한대(無限大)인 것이다.
0을 존중하라. 0 안에는 기쁨도, 슬픔도, 절망도 있지만 그들 모두 결국은 깨달음을 주기 위해 온 것들이다. 왜 노인들이 젊은이들보다 깨달음을 많이 갖고 있는가? 탄생과 죽음이라는 0 안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고 결국 얻은 것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아픔도 기쁨도 0 안에서 굴러다니다 보면 무덤덤해지고, 모진 것도 0 안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면 둥근 것이 된다. 희로애락이라는 모난 것은 깎여 사라지고 0 모양의 밋밋한 깨달음만 남는다.
한 해가 끝났고, 새로운 한 해를 맞았다. 하지만 0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면 시작도 마지막도 없다. 임의로 정해놓은 한쪽 끝들, 혹은 찍어놓은 점의 이름이다. 그들의 선(線)상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했을 것이다. 뒤돌아 숙고하면 기쁨 다음에는 분노가, 슬픔 다음에는 즐거움이 뒤따랐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섞이면 0이 된다.
한 해도 아픈 자들과 같이했다. 당해보지 않고 어찌 아픈 자들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픔만이 아픔을 안다고 한다. 나도 아파봤다. 그래서 아픈 자들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지나친 망상이었다는 것을 지금 시인한다. 아픈 자들은 아픈 자들이고 나는 결국 나이지 그들 자체가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래도 한 번 더 아픈 자들을 보듬어보려 한다.
한 번도 아파보지 않은 자처럼. 그래도 한 번 더 사랑해보려 한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자처럼. 0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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