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 예산리에서 태어난 가수 백년설의 본명은 이창민(李昌民)입니다. 성주농업보습학교(현재의 성주중'고교)를 마치고, 은행원 등의 경험을 거쳤지만 이창민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목표, 즉 작가가 되려는 꿈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한 시골청년에게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가수로서의 재능이 꽃필 수 있는 계기가 다가왔으니 그것은 1930년대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이었던 극작가 박영호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명을 백년설로 결정한 이창민은 가요작품 '유랑극단' 한 곡으로 단번에 인기가수 반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식민통치의 압제를 이기지 못하고 유랑민의 신세로 전락한 1930년대 당시 한국인의 처지와 슬픈 존재성을 상징적으로 잘 담아낸 명작입니다.
한 많은 군악소리 우리들은 흐른다
쓸쓸한 가설극장 울고 새는 화톳불
낯설은 타국 땅에 뻐꾹새도 울기 전
가리라 지향 없이 가리라 가리라
이후로 가수 백년설은 태평레코드사의 간판격 가수로 자리를 잡고 잇따라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게 됩니다. 우선 떠오르는 백년설의 대표곡 목록을 손꼽아 보더라도 다음 작품들이 당장 떠오릅니다. 하나같이 슬픈 아름다움을 지닌 주옥 같은 가요작품들이지요.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일자일루' '대지의 항구' '삼각산 손님' '고향길 부모길' '고향설' '어머님 사랑'.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에서 우리는 내 나라 내 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자 일본의 종살이로 전락해버렸던 식민지 시대 한국인의 내면풍경을 감지합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되는 '번지 없는 주막'도 마찬가지로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적막한 처지와 방황심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인 검열 당국자들도 '주막에 번지가 없다고 말한 속뜻이 무엇인가'를 따지며 생트집을 잡았다고 합니다. 또 백년설은 유난히 고향과 어머니를 다룬 노래들을 많이 불렀습니다. 그리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살려 가사 제작에 백년설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해방이 되고, 전 국토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전쟁 중에는 대구로 내려와서 '청동원'(靑童園)이란 이름의 고아원, 목재소, 서라벌레코드사 등을 운영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활발한 운영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1950년대 초반, 대구로 피란 내려와 있던 문화예술인들은 백년설이 운영하던 봉덕동 이천교 가까운 수도산 기슭의 고아원 2층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중섭, 구상, 박용주, 박연희, 최태응, 최정희 등이 주요 단골 벗들입니다. 그곳에는 언제 들러도 마음 편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를 꾸며놓고 차와 과자가 항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길을 찾아 쫓기듯 휘몰려다니는 극도의 피로 속에서 백년설의 마음속은 항시 좌절과 허무의식으로 휩싸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무엇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일까? 경북고녀(慶北高女)를 졸업한 이한옥 여사와 사별하고 가수 심연옥과 재혼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입니다. 마침내 백년설은 말할 수 없는 허무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특정종교를 갖게 되면서 그동안 가졌던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대중가수로서 화려하게 살아왔던 과거와의 결연한 단절이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미국으로 떠나간 가수 백년설은 만리타국 낯선 곳 어느 모퉁이에서 기어이 그의 한 많은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식민지 시절, 한 가수에게 과도하게 쏟아져 내린 심적 부담을 안고 너무도 고단하게 격동기의 한 세상을 살아갔던 가수 백년설의 존재성을 다시금 차분하고 냉철하게 생각해봅니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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