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문어딜이' 개 밤샘

문어, 양반가 명성의 상징…'뼈대 없는 집안 자손' 비애도

문어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다. '바다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똑똑할 뿐 아니라 잔인하고 난폭하다. 그러나 맛은 좋다. 쫄깃쫄깃한 게 감칠맛이 일품이다.

가수 이문세의 아버지가 '글로써 세상에 이름을 알리라고 문세(文世)로 지었더니 음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음세(音世)가 되었네'라고 농을 한 것이 신문에 난 적이 있다. 문어의 조상은 그가 낳은 새끼들이 노랫가락에는 아예 소질이 없을 것 같아 가어(歌魚)란 이름을 붙이려다가 바다 속에서라도 글깨나 읽겠다 싶어 문어(文魚)라고 지었나 보다.

문어는 귀한 대접을 받는 어종이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 지방의 잔치나 상가에 가보면 문어가 얼마나 고귀하고 지체 높은 음식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반가(班家)에선 회갑, 제사, 생일잔치에 내놓는 접빈 음식 중에서도 질 좋고 값비싼 문어를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많이 내놓을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집의 재력과 명성을 무언으로 과시한다.

안동 사람들이 문어를 음식 중의 음식으로 치켜세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말해주듯 이곳은 양반 동네다. 문어의 이름 속에 문(文)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것도 한몫한다. 그리고 문어의 둥근 대가리는 무(無)와 무한(無限)을 상징하는 도(道)의 원리를 알려주는 깨달음을 뜻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또 하나, 문어 다리가 8개인 것은 부계, 모계, 처가, 진외가, 외외가 등 팔족(八族)을 상징하며 깊은 바다에서 몸을 낮춰 사는 것도 수졸(守拙)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삶을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어가 이렇게 반가의 칭송 속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다. 연체동물의 비애도 있다. '문어는 뼈대 없는 집안의 자손이어서 뼈 있는 멸치에게도 절을 해야 한다'는 유머는 그동안 쌓아온 문어의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아픔이기도 하다. 또 있다. 문어는 안동 지방에선 최고의 대접을 받지만 이 지방의 개들에겐 아무런 공헌도가 없어 욕만 얻어먹었다. '양반 문어딜이(파티)하는데 개 밤샘한다'는 유머가 바로 그것이다. 문어에 뼈다귀가 있어야 뜯어먹다 남은 것을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개에게 던져 줄 터인데 하사품을 기다리던 개들은 하마나 하고 기다리다 밤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친 개가 새벽녘에 하는 욕지거리를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아마 짐작은 하시겠지. '선 오브 비치!'(Son of bitch!)

그래도 문어는 가치가 있고 값이 비싸다. 제사상에는 마른 문어다리를 '어물새김'한 것을 밤과 대추와 함께 반드시 올려야 한다. 문어다리 하나 값도 만만치 않다. 다리를 칼로 오리는 것은 기운의 흐름을 표현한 문양이다. 연기나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가녀린 문어다리에 옮기는 주인어른의 섬세한 칼질은 바로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숭고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문어는 우리나라에서만 인기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제사상 위의 조각된 문어다리를 보고 있으면 이태리 명품 베르사체(versace)의 꽃잎무늬 문양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 출장 온 어느 디자이너가 제삿날 어느 집에 초대되어 갔다가 문어 새김을 보고 '아차' 하고 영감을 얻은 건 혹시 아닐까.

독일 와이프 수족관에 살고 있던 파울이란 놈은 점쟁이 문어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다 죽었다. 지난 월드컵 4강전 때 독일 대 스페인의 경기가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 스포츠 도박사들은 돈을 걸고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에 명운을 걸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자국의 승리 무드가 무르익어 갈 무렵 승패 여부를 파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수족관 속에 양국의 국기가 그려진 먹이상자를 두고 파울을 집어넣었다. 그 녀석은 슬금슬금 스페인 상자 쪽으로 기어가 먹이를 먹어 치웠다. 독일 사람들은 2008년 스페인 대 독일 경기의 예상이 빗나간 전례를 들어 애써 자위했지만 파울의 점보기는 적중하고 말았다. 뼈대 없는 집안의 자손인 파울이 이런 신통력을 가진 것은 영매를 통한 하늘과의 교신 때문일까. 아니면 박수와 무당들의 치성 효과가 '신내림'으로 이어지듯 파울도 남들이 보지 않는 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큰 손'(HIM)을 향해 기도를 드림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일까. 그것은 나의 영원한 수수께끼다.

문어는 맛있는 음식이다. 꽁꽁 얼어 있는 겨울에 먹으면 더 맛있다. 도반들을 불러 문어딜이나 한 번 했으면. 개를 키우는 집에서 '개새끼들'이란 욕을 얻어먹으면서.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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