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풍산인 노봉 김정과 경북 봉화 '제주송'

한국전쟁 때 훼손 후손들이 다시 심어

경상도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에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蘆峯) 김정이 조성한 소나무 숲이 대를 이어 유지되고 있다. 여느 소나무 숲과 다를 바 없지만 제주에서 공직생활한 것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씨앗을 가져와 심었기 때문에 '제주송'(濟州松)이라 부르는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마을에 숨어든 공비들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원래의 울창한 숲은 다 베어버리고, 지금은 후손들이 새로 심었는데 이름이 여전히 제주송이다.

공직생활을 하던 곳의 나무를 가져와 고향에 심은 사례는 이곳 말고도 더러 있다. 따라서 신비로워할 이유가 없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좀 특별하다. 시간적으로 300여 년 전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한 때이고, 공간적으로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제주도라는 점이다. 그때에는 주로 범선을 이용했으므로 배를 타고 육지를 오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여건이 이러한데도 씨앗을 가져와 심었으니 그 정성이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본관이 풍산인 공은 1670년(현종 11년) 영주에서 아버지 휘봉(輝鳳)과 어머니 봉화 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696년(숙종 22년)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봉화로 이주했다. 1708년(숙종 34년)에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가 함경도 도사를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10여 년간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1722년(경종 2년) 다시 출사해 병조정랑, 세자시강원 사서, 옥천군수로 재직할 때 큰 불이 나 600여 가구의 민가와 관청의 일부가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 1년 만에 수습하니 왕이 표리(表裏'옷감)를 하사했다. 이듬해 강릉도호부사로 부임했다. 관내에 세자궁이 소유한 놀고 있는 땅이 있었는데 이를 유랑민들이 무단으로 개간해 살고 있었다. 궁에서 이 사실을 알고 사람을 보내 사용료를 받으려고 하자 공이 감사와 협의해 사용료를 감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들을 정착시켰다.

또 흉년이 들자 봉급을 털어 백성을 구휼하고,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던 충신'효자'열녀의 정려각을 보수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등 선정을 베풀자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순찰사 이복명이 공의 치적을 보고하자 왕은 숙마일필(熟馬一匹'어디를 가든 말 한 필을 제공받는 제도)을 하사했다.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양무원종훈(揚武原從勳) 1등에 녹훈되었다. 강계부사 겸 관서우방어사로 나가서는 낙후된 교육을 진흥시키며 풍속(風俗)을 교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730년(영조 6년) 의주(義州) 복정선(卜定船'토산물을 실어 나르는 배) 사건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나 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의 공훈이 허위라는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의금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나 동료 권상일 등이 상소하여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아호를 딴 노봉정사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며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1735년(영조 11년) 6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제주목사 겸 호남방어사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삼천서당을 세워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는 한편, 사비를 보태고 때로는 본인이 강학을 주도하여 주민의 교육열을 불태웠고, 선박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포구개발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공이 힘을 써서 만든 조선시대 제주도의 대표적인 관문이었던 화북포(禾北浦)는 우리나라 축항공사의 효시로 불린다. 1737년(영조 13년)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기 위해 포구에 나와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슬퍼했을 뿐 아니라,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영조가 삼도감사에게 명해 제주도에서 경상도 봉화까지 운상하는 데 협조하도록 했다.

지금도 제주도에는 흥학비(興學碑)와 봉공비(奉公碑)가 전해오고 있다. 봉화의 오천서원과 제주시 영혜사(永惠祠)에 제향되고 저서로 '노봉집'이 있다.

오록(梧麓)은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을 가운데로 흐르던 물길을 서쪽으로 돌리고, 수구막이로 남쪽에 석축을 쌓고, 화를 예방하기 위해 성황당을 짓는 등 노봉이 인위적으로 상당 부분 비보(裨補)했다.

이러한 공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구한말 이전까지 대소과 51명, 음보, 증직, 수직 60명 등 111명과 최근 군 장성(將星)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한 목민관이 임지를 사랑한 나머지 그곳에 자라는 소나무의 씨앗을 가져와 고향에 심고 그것이 다 죽자 후손들이 새로 숲을 조성해 전통을 이어오며 현재까지 유지 관리하고 있다는 것은 이 삭막한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미담인가.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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