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1> 새로운 출발 ④동네에 답 있다

'동네투어' 3일 이야기 풀었더니 "내가 대화의 주인공"

아침부터 TV 앞에 앉아 지난주에 본 드라마를 또 보고 있는 60대 중반 김 씨. 모임이 있다며 부산하게 TV 앞을 왔다갔다하는 아내를 보자 슬며시 부아가 치민다. 목구멍까지 '또 나가'라는 한 마디가 올라오지만 참느라 애꿎은 리모컨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그도 할 말이 많다. "나가고 싶지 않아 집에 있는 거 아닙니다. 나가면 돈 들지요. 반기는 곳 없지요. 이 신세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동네라도 한 바퀴 돌면 낫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수십 년 살아온 동네에 뭐 볼 게 있다고 나가느냐며 시큰둥하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무료로 영화도 볼 수 있고 좋은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많다고 하자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어렵사리 그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조금 걷자니 "차를 타고 지나다니던 동네와 걸어서 보는 동네는 많이 다르네요"라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것도 있었네!

동네투어 첫날. 필기도구와 카메라를 챙겨 공공기관부터 찾았다. 집에 앉아 공공기관 홈페이지를 뒤지면 궁금증이 해결되겠지만 직접 찾아가는 재미를 맛보기로 한 것이다.

우선 집과 가장 가까운 공공도서관으로 향했다. 1층에서 리플렛을 받아 꼼꼼히 읽기 시작한 김 씨는 "요즘 도서관에는 책 보는 거 말고 인문학 강좌, 영어강좌뿐 아니라 영화도 상영하네요"라며 놀라는 표정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1월 한 달 매주 목, 토요일 상영하는 영화예고 포스터를 열심히 찍는다. 김남숙 용학도서관(대구 수성구 범물동) 관장은 "요즈음 도서관은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며 어르신들이 와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고 설명한다.

김 씨는 내친김에 회원 등록을 하고 자신을 위해 책 '은퇴쇼크'를, 아내를 위해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을 빌렸다.

책 두 권을 들고 근처 주민자치센터를 찾았다. 각종 강좌부터 챙겼다. 한 달에 1만원만 투자하면 요가 영어 노래교실 그림 간단한 악기 수업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지금 노래교실이 열리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문을 살짝 열어본 김 씨는 남자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며 관심을 보인다. 동사무소에서는 팩스 복사 프린트도 무료로 서비스한다고 하자 그는 팩스 보낼 때면 여기로 와야겠다고 한다.

조금 먼 길을 걸어 문화센터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선 김 씨는 난감해하며 "문화센터는 여자들이 가는 곳 아니냐"며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웃으며 다가온 문화센터 관계자는 "남성 수강생을 위해 역사 강좌, 컴퓨터 교육, 문화재 강좌, 재테크 강좌 등을 마련하고 있다"며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쉽다고 했다. 이웃 복지관도 다르지 않았다.

김 씨는 "한 달에 3만원만 투자하면 일주일 내내 다양한 것들을 배울 수 있겠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꿈을 찾다

이튿날 김 씨는 가까운 상가를 들러보기로 했다. 집을 나오면서 동네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배드민턴 동호인 모집' '탁구교실 안내' '색소폰 가르쳐 드립니다'를 보면서 연락처를 일일이 메모했다.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면서.

배움에 관심을 보이자 동네 슈퍼마켓 앞에서 열린 도자기전시회를 보고 도예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전직 백화점직원 이야기, 집 주변 냇가 둑에 핀 들꽃를 보고 카메라로 담기 시작해 이제는 들꽃 이름 알기에 푹 빠진 50대 후반의 이 씨 이야기도 들려줬다.

갑자기 김 씨는 색소폰을 배워야겠다며 색소폰 학원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는 색소폰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등록했다. 나오면서 내년 이맘때쯤 멋진 색소폰 연주를 들려주겠노라고 흰소리까지 한다. 어제와 사뭇 다른 적극적인 모습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공인중개사 사무실에도 들렀다. 집은 언제 팔아야 하는지 노후에는 집을 어디로 옮겨야 좋은지 이런저런 것을 물어본 김 씨는 '자주 놀러 와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내친김에 은행에 가서 요즈음 최고 이슈가 되고 있는 절세 상품들을 알아보고 리플렛도 챙겼다.

김 씨는 이웃동네까지 가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다니다 보면 주제가 있는 대구투어도 가능할 것 같다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어! 일자리도 있네

3일째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한날. 우선 시니어클럽에 문을 두드렸다. 봉사활동은 물론 돈벌이 재능기부도 가능한 곳이다. 이곳 외에 종합 사회복지관이나 노인복지관에서도 공공분야 일자리 정보를 알 수 있다.

시니어클럽에서 만난 지하철 안전지킴이 박택근(72) 씨는 "한 달 번 돈 20만원으로 지난해는 1년간 먹을 고추를 마련했다" 며 자랑한다. 재직 중 틈틈이 배워둔 서각 솜씨를 이제는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조용길(60) 씨는 "재능기부 신청을 해놓고 그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김 씨가 바리스타 교육에 관심을 보이자 시니어클럽 관계자는 "시니어들이 직접 운영하는 국수집, 떡집, 참기름집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며 "여건만 되면 3, 4개월 동안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후 어르신들이 모여 작은 카페를 운영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다음에 꼭 다시 들르겠다'며 그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주문까지 잊지 않았다.

다음날, 김 씨로부터 다소 긴 메시지가 날아왔다.

'동네투어를 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아내에게 설명했더니 모처럼 내 이야기에 흥미와 관심을 보였습니다. 친구들도 다들 함께 가보자고 하네요. 대화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얼마 만에 맛보는 뿌듯함인지. 그동안 동네를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그림: 화가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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