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짧은 시간 큰 울림

좀 일찍 붓을 놓고 작업실을 나와 당신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회복이 더디어 아직은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계신다. 수술은 큰 병원에서 하였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를 고려하여 집 가까운 병원으로 모셨다. 처음에는 자주 병실을 찾아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로 무료함을 달래 드리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일주일에 몇 번 가지 못한다.

그런데도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 좀 쉬겠다는 핑계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고작 몇 개의 귤 껍질을 벗겨 드리고는 병실을 나왔다. 도리어 나를 염려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뒤로하고 죄스러움에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을 나와 승강기에 타는 순간 시선이 멈추었다.

승강기 안에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할머니와 수수한 아주머니가 낮은 자세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서로에게 집중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언뜻 봐도 다정한 모녀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소극장 연극공연의 한 장면 같았다.

"밧줄로 꽁꽁 묶어라 내 사랑이 떠날 수 없게…" 라는 어디서 들어 본 기억이 있는 듯한 대중가요의 가사가 묘한 감정을 들게 한다. 두 사람의 너무나 간절한 열창에 숨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약간 어둔한 발음이지만 무척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정성을 다해 딸의 입을 따라 화음을 맞추고 있었다. 또 그 아주머니의 한 손은 할머니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마치 악단의 지휘자처럼 손바닥을 펴서 아래위로 흔들며 고개도 힘 있게 끄덕여 할머니와 온 힘을 다해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고 전율로 몸이 굳어졌다. 이 세상에 어떤 배우의 연기가, 또 어떤 가수의 노래가, 그 어떤 음악가의 지휘가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을까.

짧은 시간이지만 너무나 큰 울림이다. 다정히 멀어지는 모녀의 모습 뒤로 병실에 계시는 당신의 얼굴이 겹쳐졌다. 무언가에 끌리듯 계단을 걸어 다시 당신이 계신 병실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당신은 "뭐 이잣붓나 와 또 왔노?" "바쁠 긴데 얼른 가봐라" 하시며 일찍 귀가해서 애들과 같이 저녁 밥상 마주하라고 하신다. 또 다른 이런저런 자식을 위한 간곡한 성화에 말없이 당신의 손을 꼭 잡고 어금니를 깨물어 보이지 않게 눈물을 삼켰다. 긴 시간 당신의 옆을 떠날 수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의무처럼 왔다가 불편한 데 없으시냐고 몇 마디 던지고는 휑하니 돌아올 때도 많았다. 그동안 나름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줄 알았는데…. 아주 먼 훗날 이런 것들이 모두 후회로 돌아올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도 그 후회를 또 만드는 못난 길을 걷고 있다.

"어머니! 당신이 집에 계시지 않는 섣달그믐날 밤은 참으로 길기만 합니다."

김윤종 화가 gilimi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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