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버스로 그리는 경북 스케치] <10>문경 토끼비리길에서 석탄박물관까지

토끼가 겨우 지나는 길 사람들 왜 그리 많은지 바위가 닳아 반질반질

전날 밤부터 시작된 비가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다. 비와 함께 일정도 뒤죽박죽이 됐다. 무엇보다 반들반들한 오솔길인 토끼비리길을 갈 수가 없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수행도량인 봉암사를 방문하려 했지만 사찰 측이 난색을 보여 다시 포기했다. 문경시 농암면과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인 쌍용계곡으로 가려던 계획도 버스 시간을 맞추지 못해 무산. 하루를 고스란히 공치고 다음 날 오전 일찍 길을 나섰다.

◆벼랑길에 남아있는 옛 흔적

문경 토끼비리길의 시작은 진남휴게소다. 점촌동 문경 시내버스터미널에서 문경읍 방면으로 가는 100번, 200번, 3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하루에 100번은 13회, 200번은 22회, 300번은 16회 운행하니 버스 타긴 수월하다.

오전 9시 10분 문경새재로 가는 200번 버스에 올라탔다. 진남휴게소까지는 25분 정도 걸린다. 진남휴게소 뒤편에 있는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폐 선로를 지나 바위 포장길이 나온다. 진남문 오른쪽으로 꺾으면 토끼비리 초입이다. 토끼비리는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갈 정도로 좁은 벼랑길'이라는 뜻. 말 그대로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한 구간이다.

지난가을 쌓인 나뭇잎들이 질척거리며 푹푹 밟혔다. 산허리를 돌아드는 폭 1m의 오솔길 옆으로 수십 길 절벽이 내려다보인다. 아찔한 발아래로 겨울이 녹아내린 영강이 세찬 소리를 내며 흘렀다. 사람의 손으로 깎아 만들었다는 바위길은 오랜 세월 발길에 부대끼며 반질반질 윤이 났다. 안전을 위해 곳곳에 데크를 설치하고 밧줄을 연결해 둔 덕분에 보기만큼 위험하진 않다. 구불구불 오솔길을 따라 500m가량 걸어가니 벼랑 끝에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 서면 영강의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가 어우러지는 진남교반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토끼비리 전망대에서 길을 되돌려 나오면 진남문과 고모산성이다. 4~5세기경 신라가 북진을 위해 축조한 고모산성은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거쳐 옛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복원되지 않고 성벽 끝에 남은 옛 성곽이 더욱 발길을 사로잡는다. 진남문으로 들어가면 문경의 마지막 주막인 영순주막과 예천의 삼강주막을 복원한 주막거리를 만난다. 조금 더 들어가면 성황당이 보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고모산성에 오를 수 있다. 산성 위에서는 낙동강 지류인 가은천과 조령천이 영강에 합류하였다가 돌아나가는 모습과 너른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온다.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신현리 고분군이다. 6세기 무렵에 축조된 고분 60여 기에 탐방로가 조성돼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다.

◆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요, 물을 만나면 나루다

이른 점심으로 진남휴게소에서 라면 한 그릇을 주문해 후룩거렸다. 오후 12시 30분 진남휴게소 앞에서 문경새재로 가는 200번 버스를 탔다. 주말인 탓인지 버스 안에 젊은 관광객들이 꽤 많다. 문경읍을 지나 문경새재까지는 버스로 20분 정도 걸린다. 주차장에서 내려 제1관문인 주흘관까지는 1.5km,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문경새재 과거 길. 그 길에는 옛 선비들의 꿈과 간절함,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하지만 적어도 매표소까지는 옛 선비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식당 안으로 몰려들어 가는 단체 관광객들과 돼지고기를 굽는 매캐한 연기가 허기와 불쾌감을 자극할 뿐이다. 매표소를 지나 500m가량 걸어가면 제1관문 주흘관이다. 여기서 제2관문인 조곡관까지는 3km, 제2관문에서 제3관문 조령관까지는 3.5km가량 떨어져 있다. 걸어서 왕복 4시간이 넘는 거리다. 고심 끝에 주흘관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버스 여행은 언제나 시간에 발목이 잡힌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옛길 박물관에 들렀다. 국내 최초로 길을 주제로 한 전문 박물관이다. '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요, 물을 만나면 나루다. 크고 작은 길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산과 물을 연결하고 인간의 삶을 이어준다.' 이 말만큼 길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값비싼 유물이나 유명한 유적이 없어도 박물관은 풍성하다.

문경새재에서 문경 공용버스정류장까지는 5분이면 도착한다. 오후 2시 25분 '문경-가은'농암' 버스를 타고 20분가량 달리니 가는 버스터미널이다. 가은역 방향으로 걸었다. 한때 석탄을 실어나르던 가은역은 2004년 가은선 폐선과 함께 폐쇄됐다. 왕릉1교를 건너면 은성광업소 자리에 지은 가은 석탄박물관이다. 구공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외관에 탄광 전시장과 채굴에 사용됐던 각종 장비, 꼬마열차까지 원형 그대로 전시했다. 당시 광부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한 사택들도 꽤 볼만하다.

◆지하에서 숨져간 아까운 목숨

"따르릉, 따르릉." 1979년 10월 26일 오전 6시. 곤하게 자고 있던 최종수(72'당시 38세) 씨의 집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굴 속에 일이 났으니 빨리 갱도 사무실로 나오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옷을 꿰입고 나간 갱도는 아수라장이었다. 채굴한 석탄을 운반하는 고무 재질의 컨베이어 벨트가 불에 타는 사고. 갱 안은 온통 짙은 연기로 자욱했다. 최 씨를 반장으로 구조대가 편성됐다. 산소통을 매고 갱도로 들어갔지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최 씨는 "줄을 50cm 간격으로 묶고 들어가려 해도 연기와 열기 때문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 탄광 안에 갇힌 사람은 126명.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형 선풍기를 설치해 연기를 빼낸 다음 날 새벽, 다시 구조대가 투입됐다. 뜨거운 열기에 암석을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가며 전진했다. 지하 600m까지 내려가는데 무려 10시간이 걸렸다. "지하수가 흐르는 갱도 근처에 가니까 인기척이 나요. 유독가스가 물에 막혀서 못 들어오니까 그쪽으로 몰린 거예요." 사고 발생 사흘 만이었다. 44명이 숨지고 82명이 구조되는 최악의 사고였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습당한 '10'26사태'와 맞물리며 조용히 묻혀버렸다. 사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1년 1월 6일 화재로 붕괴 위험이 컸던 탄광 대신 재개발한 옛 광업소 갱도에서 붕괴 사고가 터졌다. 물과 석탄이 뒤섞인 '죽탄'이 광부들을 덮쳤고,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 씨는 두 번째 사고에서도 구조 반장으로 투입됐다. "묻혀 있던 광차를 하나씩 끄집어내는데 산산조각이 난 시신이 나와요. 안전등에 쓰인 고유번호로 사망자 신원은 확인되는데 팔다리는 그냥 비슷하게 맞추는 수밖에 없었어요." 최 씨가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성광업소가 생긴 이래 목숨을 잃은 사람은 166명이나 된다.

◆지하 막장 속 산업전사들

이대규(75) 씨의 고향은 가은면 도탄리. 지금은 사라진 마을이다. 1960년대까지 30여 가구가 살았지만 은성탄광이 확장하고, 민가가 모두 이주하면서 고향도 사라졌다. 이 씨는 "당시 광부 되기는 육군사관학교 입학보다 어려웠다"고 했다. 농사 외에는 먹고살 길이 없고, 별다른 기술도 없던 농촌 청년들에게 광부는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광부는 녹록한 직업이 아니었다. 30℃가 넘는 지하 500m 탄광 안에서 탁한 공기를 마시며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해야 하는 극한의 작업 환경,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최 씨는 탄광으로 들어가던 첫날을 잊지 못했다. "1968년 10월 10일, 삽을 들고 인차를 타고 들어가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지. 무거운 작업복에 숨쉬기도 힘든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데 참 힘든 거라." 한 달을 꼬박 일하고 받은 월급은 3천원. 쌀 한 가마니에 2천8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정식 광부가 되고는 월급이 올랐다. 한 달 월급이 읍 서기의 석달치였다.

탄광 주변 술집은 24시간 불이 켜져 있었다. 광부들은 거의 매일 삼겹살에 대폿잔을 기울이며 그날의 피로를 풀었다. 사고가 빈번하다 보니 미신이나 징크스도 많았다. 여자들은 광부들이 출근할 때 가로질러 가지 못했다. 출근 전에 다른 여자가 찾아오거나 꿈자리가 뒤숭숭해도 출근하지 않았다. 아내는 도시락에 밥을 4주걱은 푸지 않았고, 남편이 출근하면 신발을 방 안쪽을 향하게 뒀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의미였다. 광부에게 가장 소중한 동물은 '쥐'였다. 유해가스가 누출되거나 갱도가 붕괴 위험을 겪을 때 가장 먼저 감지한다는 이유였다. 도시락을 먹을 때면 쥐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밥을 받아먹곤 했다. 오랜 광부 생황, 진폐증이 훈장처럼 남았다. 이 씨는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광부를 해서 자식 교육 다 시키고 살았으니 감사하게 생각해요. 다닐 때는 짜증도 내고 그랬지만 지금 나쁜 걸 기억할 일이 있나요. 웃고 마는 거지."

가은에서 상주로 가려면 점촌으로 돌아와야 한다. 가은에서 점촌까지는 55분이 걸린다. 오후 4시 40분에 버스를 타고 점촌으로 돌아온 뒤 오후 5시 40분 상주 방면으로 운행하는 100-1번으로 갈아탔다. 점촌에서 함창을 거쳐 상주 종합버스터미널까지는 50분이 걸린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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