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가명'여'15)이 책상 위엔 공책이 한 권 놓여 있다. 공책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현진이가 그린 만화 캐릭터 그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현진이는 옆에 있던 샤프펜슬을 집어들고는 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세 현진이를 닮은 듯한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완성됐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애니메이터가 꿈'이라는 현진이는 지금 앓고 있는 백혈병 때문에 어른이 돼서 꿈을 이룰 수 없을까 봐 겁이 난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백혈병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09년, 감기 한 번 앓지 않던 현진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 열과 함께 감기 증상이 나타났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심하게 체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한 어머니 강은형(가명'여'56) 씨는 현진이를 동네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게 하고 약을 지어 먹였다. 하지만, 3일이 지나도 현진이의 감기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더 심해졌다.
다시 병원에 갔고, 약을 먹으면서 버텼지만, 차도가 없었다. 답답해진 강 씨는 현진이를 한의원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큰 병인 것 같으니 종합병원으로 바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임파구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현진이는 "엄마가 백혈병이라고 했을 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몰랐다.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허리까지 길렀던 머리를 자를 때 실감할 수 있었다"며 "늘 그랬던 것처럼 참으면 될 줄 알았다. 버티고 참고 견디면 되는 줄 알았다"며 눈물을 훔쳤다.
강 씨는 미용사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 현진이를 키워왔다. 현진이가 세 살 되던 해 이혼했기 때문이다. 강 씨는 "항상 미장원 일이 늦게 끝났기 때문에 현진이는 늘 혼자 저녁을 먹어야 했다"며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착한 아이에게 왜'''"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밖에 나가 놀고 싶어요"
현진이는 2009년부터 2년 동안 지루한 항암치료를 견뎌냈다. 늘 굵은 주삿바늘이 현진이의 쇄골 쪽 동맥을 뚫고 들어갔고, 머리도 빠졌다. 식도와 기도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숨을 쉬지 못해 산소호흡기를 써야 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현진이에게 맞는 약을 구하지 못해 강 씨가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현진이는 병원에서 사이버 강의 등을 통해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현진이는 지금 중학교 과정도 사이버 강의로 듣고 있다. 통원 치료를 받고 있긴 하지만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데다 재발 위험이 가장 큰 시기여서 학교에서 수업하는 게 아직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아무래도 40분씩 3교시로 진행되는 사이버 강의만으로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가기 어려운데다 항암치료로 인한 부작용 때문인지 집중이 잘 안 되고 피곤함도 쉽게 느껴 공부하는데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아프기 전에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던 공부가 지금은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공부하기 어려운 것보다 더 속상한 건 같이 놀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백혈병으로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현진이를 알던 친구들과 점점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가끔 찾아오는 친구도 지금은 한 명뿐이다.
현진이도 자신의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고 싫어 좀체 바깥에 나가지 않는다. 혹시 아는 친구들을 만날까 봐서다.
"건강한 친구들은 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재미있게 노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니까 친구들 만나는 게 아직은 꺼려져요. 병이 나으면 제일 먼저 해보고 싶은 건 낮에 바깥에 나가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놀러다니는 거예요."
◆병도, 돈도 산 넘어 산
현진이의 백혈병은 완치되기 어려운 병이다. 10년 동안 통원 치료하며 매달 한 번씩 병원을 찾아가 검진을 받아야 하고 7년 동안은 6개월에 한 번씩 입원해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항암 치료보다 재발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지금이 현진이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강 씨는 현진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미장원 일을 그만뒀다. 강 씨 모녀의 한 달 생계비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게 지급되는 정부보조금 65만원이 전부다. 일을 그만두면서 병원비와 생활비는 강 씨의 지인들에게 빌리거나 신용카드를 통해 해결했다.
정부보조금 중 일부로 갚아나가고는 있지만 감당하기가 어려워 법원에 파산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국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사실상 힘들다. 쌓이는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긴급의료지원비를 신청했지만 현진이의 병이 신청 요건에 맞지 않아 지원받지 못했다.
강 씨 또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앓아오던 B형 간염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데다 현진이를 간병하는 동안 몸이 많이 상했기 때문이다. 강 씨는 "요즘 갑자기 눈도 침침해지고 어지럼증도 심해져 여기저기 부딪히는 일이 많다"며 "배운 게 미용 일밖에 없는데 설령 다시 할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예전처럼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현진이는 그림을 그린 뒤 공부할 준비를 했다. 비록 동영상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경우가 잦은 낡은 컴퓨터이지만 이 컴퓨터마저 없으면 현진이는 공부를 할 수가 없다. 현진이는 "글쓰기를 통해 생각하는 법이나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국어를 제일 좋아한다"며 "얼른 병이 나아 친구들 앞에 당당하게 서고, 애니메이터가 되는 꿈도 꼭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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