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외로운 성공보다 함께하는 행복으로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 이틀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 주지 않아. 아브라카타브라. 기적은 반드시 일어나.(어느 사설 교육업체의 광고 문구)

포털과 SNS를 가득 채웠던 유명 사설 교육업체의 광고 문구를 읽었다. 학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과 당혹감에 무척 쓸쓸했다. 뉴스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현재 교육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었다'는 비판적인 반응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뭘 새삼스럽게'라는 반응도 제법 많았다. 해당 업체는 "새 학기가 됐으니 열심히 공부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10대들에게 가장 와 닿는 소재인 친구를 차용했다. 캠페인 광고인 만큼 속뜻을 이해해 달라"고 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단다.

최근 언론에서는 '방과 후 전 과목 끝장반 집에서는 잠만 재우십시오' '영어올인반, 수학올인반, 죽을 때까지 시킵니다' '도전하십시오. 지옥훈련반, 수학귀신반' 등의 광고 문구도 소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정글의 법칙에서 아이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이 담겨 있다.

2011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분석보고서에는 한국 청소년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 지표'가 36개 나라 중에서 35위에 그쳤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과정은 상관없이 결과만을 위해 무조건 앞으로, 위로 걸어가야 한다는 교육 풍경이 낳은 비극적 결과이다.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량을 말한다. 나를 제외한 타인이 경쟁 상대로만 존재할 때 이 역량은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 공감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성공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건 '외로운 성공'이다. '우정이란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부정한 광고 문구는 아주 위험한 진술이다.

한동안 핀란드 교육 열풍이 불었다. 교육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면 전혀 다른 문화적 풍토 속에서 무조건 그 방향으로만 몰입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정책은 언제나 이상과 현실의 경계선에 존재한다. 교육 철학과 교육 현실이 상보적인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핀란드 교육 방식을 따르면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로 인해 아이들이 현재 행복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난 3월 18일 방한한 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의 말이 흥미로웠다. 그는 "경쟁은 교육에 해롭다"고 단언했다. 핀란드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교육선진국이 된 것은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강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다양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학교의 다양화'가 아닌 '학습의 다양화'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 살고 있다. 공동체는 공동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개인들을 통해 성립한다. 개인들이 공동체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면 공동체는 재생산에 실패하고, 파편화된 개인들만 남는다. 위 광고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란 단체에서 광고를 패러디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성적이라는 어쩔 수 없는 명분으로 학원가를 헤매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너의 우정은 하루하루 서랍 속에서 흐려지겠지. 근데 어쩌지? 우정 없이 최고가 된들 성적이 너의 우정을 대신해주지는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어른들은 너의 우정을 만들어주지 않아. 아브라카타브라. 기적은 반드시 일어나. 나는 너의 우정을 믿어.'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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