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읍디다.(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시가 있고 때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란 말이 이를 설명하고도 남는다. 나와 나의 도반들은 꽃구경은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고 다만 꽃 몽우리 몇 개만 봐도 대성공이라며 허적허적 선운사 동백 숲을 향해 걸어갔다. 미당이 그랬던 것처럼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다. 막걸리 사발에 육자배기 가락을 말아 먹었던 미당을 생각하니 술 생각이 간절하다. 이곳 선운사 입구의 주막거리는 복분자 술과 풍천장어로 이름난 곳이다. 숯불 석쇠 위에서 익고 있는 장어에 맛있는 양념을 덧칠해 가며 색깔조차 아름다운 복분자 술을 한잔했으면 원이 없겠다. 다행스럽게도 넓은 엉덩이 실룩거리며 육자배기 대신에 '고장 난 벽시계'라도 흥얼거리는 주모가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미당이 부러울 일은 하나도 없겠다.
주차장 입구부터 시작되는 평지 도량은 참배객이 많지 않아 더 넓어 보였다. 경내의 나무들은 가난한 집 아이들처럼 하나같이 헐벗은 맨몸이다. 어느 것 하나 푸른 기운은 돌지 않았다. 북풍한설을 몰고 왔던 겨울 기운은 수은주의 마지노선인 영하와 영상 사이에서 그네를 타고 있었다.
선운사를 두고 '꽝의 가람'이라고 한 말은 잘못된 말이다. 동백이 피기 전에 찾아온 관광객들이 동백을 나무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선운사 동구'란 시를 읽을 때마다 동백 탓은 하지 않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걸 보면 미당이란 시성(詩聖)의 능청스러움에 감탄할 뿐이다.
선운사는 동백꽃 좋고, 도량 넓고, 등산로가 일품인 아름다운 사찰이다. 거기에다 도솔암이란 암자와 절 입구의 부도밭이 소설 같은 이야기 한 자락씩을 품고 있어 재미에 재미를 더해 준다. 선운사는 승주의 선암사와 더불어 바쁜 일상 때문에 한두 해 찾아가지 않으면 문득문득 생각나는 여인처럼 보고 싶고 그리운 그런 절집이다.
도솔암 마애불의 가슴속에는 세상을 바꿀 비결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그 비결에는 벼락살이 함께 들어 있어 아무도 꺼낼 용기가 없었다. 간 큰 전라감사 이서구가 벼락 맞을 각오를 하고 17m 높이의 복장감실로 기어 올라가 비결을 꺼내 첫 장을 들쳐 봤다. "이서구가 열어본다"(李書九開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벼락이 쳐 다음 장은 펴 보지도 못하고 비결을 감실 안에 던져 버렸다.
나중 그 비결은 동학도인 손화중의 접에서 다시 꺼내보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벼락살을 걱정했지만 전라감사에 의해 한 번 저질러졌으니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될 것이란 오하영이란 도인의 훈수를 믿고 동학도들이 그 비결을 꺼내 갔다. 동학군에 의해 세상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마애불의 행투는 만만치 않았다. 수백 명이 무장현감에게 잡혀가 주모자 3명이 사형을 당하고 나머지는 흠씬 두들겨 맞고 풀려났다. 이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사실이다.
선운사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 부도밭에는 백파선사의 부도비와 추사가 지은 비문을 빗돌에 새긴 것이 서 있다. 선문(禪門)의 중흥주라 불리는 백파선사와 선비인 추사 김정희 간에 선교(禪敎)논쟁이 치열하여 한때는 말싸움에 가까운 왕복 서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유불(儒佛)의 선두주자들의 논쟁도 백파선사의 입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이에 추사는 자신의 아픈 심사를 글로 지어 빗돌에 새기게 하여 그동안의 왈가왈부는 '도(道)의 나눔'이었다고 결론을 냈다.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뻔한 사건이 우의로 끝을 맺었으니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하다.
장날마다 물고 뜯고 싸우며 '나라를 해롭게'(國害)하는 의원들이 하루 짬을 내 이곳 선운사 부도밭에서 백파와 추사의 아름다운 화해방식을 배워 갔으면 좋으련만. 사찰 경내에 골프장이 있으면 혹시 올까 몰라도 아무도 안 올 거야.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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