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돼지 죽음에 관한 단상(斷想)

어렸을 때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은 언제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몰랐다. 닭은 귀한 손님이 찾아오거나 가족 중 생일이 있는 날이면 목이 달아나기 일쑤였고, 개도 여름날이면 흔하게 감나무에 매달렸다. 돼지는 일정한 무게가 되면 마을 잔칫집이나 초상집으로 팔려갔다. 평소에는 사람과 한 집에서 식구처럼 살지만 막상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잡아먹히기 위해서 길러지는 가축들의 운명이기도 했다. 가축 중에서도 돼지를 잡는 일은 그 자체가 큰 이벤트였다.

다른 가축과 달리 돼지는 죽는 과정도 퍽이나 요란스럽다. 별난 체형 탓이다. 돼지는 목이 굵어 턱 선이 따로 없다. 목줄을 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발이 묶여 거꾸로 매달린 채, 우리에서 끌려 나온다. 모가지가 없어 따로 겪는 곤욕이다. 또 머리 부분에도 비계가 많이 붙어 있어, 망치로 급소를 맞아도 잘 죽지를 않는다. 비계가 완충작용을 해서 그런 모양이다. 그 때문에 고통이 오래간다. 돼지는 체형적 특징 때문에 덤으로 수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 별난 짐승의 소리는 생각보다 시끄럽다. 돼지 소리가 조용한 시골마을 하늘을 가르면, 별로 볼거리가 없어 무료해하던 시골 아이들은 그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돼지 잡는 모습은 훌륭한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우물가로 끌려온 돼지는 가마솥에 물이 끓기 시작하면 망치로 머리통을 얻어맞는다. 그때 비명이 절정에 달한다. 발이 묶여 있어 오직 소리로만 발악을 할 수밖에 없는 돼지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른다.

따지고 보면 돼지 잡는 일은 끔찍하고도 처참한 광경이지만 구경꾼 어느 누구도 죽는 돼지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다. 굵은 나무작대기에 거꾸로 매달려 소리를 지를 때도, 머리를 맞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도 아무도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 요즘에도 고사용 돼지머리를 보고 측은지심을 가진 이는 드물 것이다. 오히려 귀나 코에다 돈을 꽂고, 입에 물리는 등 장난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왜 그럴까? 돼지 특유의 우스꽝스런 생김새가 일종의 편견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라는 뜻이다. 이 말만 가슴에 품고 살아도 이해심 있는 사람 혹은 사려 깊은 사람으로 존경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프지 않으면서도 아픈 사람들을 헤아릴 줄 줄 알고, 가졌으면 못 가진 사람과 나누어 쓸 줄 알고, 유능하면 무능한 사람들을 같이 데리고 갈 줄 아는 사람이 많은 세상을 꿈꿔본다. 돼지의 죽음과 같이 왜곡된 시각도 바르게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이 진정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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