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버스로 그리는 경북 스케치] <17>역사와 풍경을 따라…영양 두들에서 감천까지

정부인 張씨의 '음식디미방' 산실 두들마을 340년 뜻 지켜온 종부들

청송군 진보면에서 영양군 영양읍까지 가는 길에는 손쉽게 둘러볼 만한 장소들이 꽤 있다.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들렀다 나오면 31번 국도를 따라 선바위관광지와 서석지, 영양산촌생활박물관, 감천마을 등이 멀지 않다.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하는 '진보-석보' 버스를 타기로 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정류장을 검색하니 진보문화체육센터 앞 정류장에서 정차한다고 나온다.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시간은 이미 오전 9시가 넘어가는 상황. '뭐가 단단히 잘못됐다' 싶어 행인에게 물으니 엉뚱한 장소였다. 인터넷에 또 속았다. 영양 방면 버스는 진보면 외곽을 돌아가는 큰 도로로만 다닌다. 허겁지겁 진보정류소로 돌아오니 이미 오전 9시 10분 버스까지 놓쳐버린 뒤였다. 2시간을 꼬박 기다린 뒤에야 오전 11시 석보행 버스를 탔다. 요금은 1천500원, 15분이면 족하다.

◆장계향 할머니의 음식디미방

석보파출소 앞에서 내려 마을 안쪽 오르막길로 250m가량 올라가다 예배당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두들마을이다. 가장 먼저 만나는 장소는 한옥체험관과 음식디미방이다. 두들마을은 조선 인조 때인 1640년 유학자인 석계 이시명이 정착한 후 재령 이씨 집성촌이 됐다. 석계보다 더 유명한 인물은 부인인 장계향이다. '여중 군자'로 불렸던 그는 일흔의 나이에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썼다.

안으로 들어가니 고운 얼굴의 조귀분(63) 음식디미방보존회 회장이 반갑게 맞았다. 석계의 13대 종부인 조 씨는 남편인 종손 이돈(75) 씨와 살며 음식디미방체험관을 운영 중이다.

조 씨가 고향으로 돌아온 건 2010년 9월이었다. 20여 년 전 종택을 짓고 도회지와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2년 전에야 정착했다. 이후 조 씨는 장계향 할머니가 전해준 146가지 음식을 일일이 해보면서 손에 익혔다. "음식디미방의 조리법에 따라 만들면 음식이 참 고급스러워요. 허투루 만드는 법이 없고요. 가령 음식디미방의 잡채에는 당면을 쓰지 않아요. 맨드라미 물을 들인 동아와 새송이버섯, 오이, 미나리, 가지, 시금치, 고사리 등 제철 나물을 볶거나 데치고, 꿩고기 육수에 된장을 넣어 싱겁게 간을 맞춘 다음 참기름과 밀가루를 넣어 끓이고, 꿩고기를 삶아 가늘게 찢어 접시 중앙에 놓습니다."

조 씨는 "그렇다고 요리가 어렵지만은 않다"고 했다. "할머니는 '구하기 쉬운 재료를 쓰라'고 당부하셨어요. 대체할 수 있는 재료 20여 가지를 써 놓고 그 중 구하기 쉬운 걸 쓰라고 하셨죠." 장계향은 일흔다섯 살의 나이에 호롱불 아래서 책을 썼다. 책 뒤편에는 '이리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대로 시행하고 딸들은 이 책을 베껴가되,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마라'고 쓰여 있다. 조 씨는 "그 덕분에 아직까지 책이 남아 있는 것"이라며 "340년 전 어렵게 책을 썼던 할머니의 뜻을 받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문화관광해설사인 오정혜(39) 씨의 안내로 두들마을을 둘러봤다. 두들마을에는 석계와 장계향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전통가옥 30여 채가 보존돼 있다. 석계종택은 석 삼자(三) 형태다. 경북 북부지역의 전통 가옥이 대부분 'ㅁ' 자 형태인 것과는 차이가 난다. 집은 소박하고 단출하다. 두들마을 북서쪽에는 조선 중기 유학자 주곡 이도의 주손 댁인 주곡고택과 유우당 등 200년 이상 된 고택들이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다. 소설가 이문열이 후진양성을 위해 지은 광산문학연구소와 장계향 유물전시관 등도 둘러볼 만하다. "석계와 장계향은 도토리나무를 심어서 배 곯는 사람들이 도토리로 죽을 쑤어 연명케 했어요. 그런 베푸는 마음이 건강과 장수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서석지와 선바위관광지

서둘러 길을 나서려는데 오 해설사가 "서석지도 안내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홀로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없고, 고민 끝에 호의를 받아들였다. 두들마을에서 서석지까지는 차로 10분이면 된다. 서석지로 가는 길에 남이포를 바라보는 형상의 선바위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서석지는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연못으로 꼽힌다. 조선 광해군 5년 석문 정영방이 조성한 정원이다. 가로 13.4m, 세로 11.2m, 깊이 1.3~1.7m로 요(凹)자 형이다. 못 가운데 연꽃을 심고 마을 주변에서 나는 크고 작은 암석을 배치했다. 물 위로 드러난 돌이 60여 개, 잠긴 돌이 30여 개다. 그 중 19개의 돌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름마다 시를 짓는 식이다. 평범한 자연 속에 시와 그림을 넣는 셈이다.

조선의 정원은 만든 이의 정신세계나 이상향이 숨어 있다. 정영방은 광해군 시절 성균관 진사를 지내다 은거했다. 경정(敬亭)의 '경'은 유학자들에게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었다.

연못에는 모두 90여 개의 돌이 있는데 이름이 붙은 곳은 19개다. 연못 중간에 있는 돌의 이름은 '통진교'(通眞橋). '신선의 세계로 가는 다리'라는 뜻이다. 통진교의 정면에 있는 큰 돌은 '선유석'(僊遊石)으로 '선인이 노니는 돌'이다. '기평석'(棋枰石)'은 신선이 바둑을 두는 장소이고, '와룡암'(臥龍巖)은 제갈량의 별명인 와룡 선생을 빗대'세상으로부터 숨어 있지만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뜻이라는 것. '영귀제'(詠歸堤)는 '귀향을 노래하는 언덕'이라는 의미로 논어의 일화에서 따왔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물었다. 다들 출세를 얘기했지만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만이'늦은 봄 옷을 갈아 입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고 싶다'고 했다. 번잡스러운 세상사를 뒤로하고, 소박한 삶을 바라는 뜻일 터다.

논어나 중용에서 따온 글귀들이 많지만, 신선이나 선계 등 도교의 영향도 강하게 보인다. 서석지는 정자가 있는 내원과 외부의 경치를 빌려온 외원으로 구분된다. 400년 된 은행나무는 오래된 정원에 깊은 운치를 더한다.

서석지에서 선바위관광지까지는 산책로와 등산로를 따라 2㎞가량 걸으면 남이정과 연결된다. 선바위는 겸재 정선의 그림 '쌍계입암'의 배경이기도 하다. 울룩불룩한 형상의 남이포는 반변천과 창기천의 물길이 한데 모이는 합수지점이다. 양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면서 뾰족하게 깎아냈다. 남이정에서 강 건너에 촛대처럼 선 기암이 선바위다. 선바위와 남이포에는 역모를 꾀한 도적을 토벌한 남이장군이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는 설화가 서려 있다. 선바위 관광지에는 영양고추홍보관과 분재수석 야생화전시관이 있다. 관광지 잔디밭에는 따뜻한 봄볕을 맞으러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주민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하지만, 관광지 중간에 폐허로 남아 있는 유스호스텔이 눈에 자꾸 밟혔다.

◆산촌박물관 오영도 마을과 캠핑장

선바위관광지에서 외씨버선 길을 따라 20여 분가량 걸으면 영양산촌생활박물관이 나온다. 박물관 건물 앞에는 투방집과 너와집, 굴피집 등 산촌의 집들을 그대로 재현해뒀다. 쟁기를 끄는 소와 산촌의 집안 풍경, 연자방앗간 등도 꽤 흥미롭다. 박물관은 산촌의 살림살이와 마을살이, 화전경작, 공예활동 등 계절별로 산나물을 다듬고 보리를 타작하고 장을 담그는 모습을 모형으로 전시했다. 효녀 심청과 별주부와 토끼,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등 전통 설화를 조형물로 표현해두기도 했다.

박물관 앞에서 오후 4시 영양읍행 버스를 타고 감천마을로 향했다. 서정시인이자 항일시인인 오일도(1901~1946)의 고향이다. 마을 안은 고택과 최근 지은 듯한 한옥들이 뒤섞여 있다. 마을 입구에는 오일도 시공원과 쉼터가 조성돼 있고, 영양문학 테마공원을 거닐며 숨을 고르기도 좋다. 마을 중심에 있는 오일도 생가에는 여전히 후손들이 산다.

감천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길 건너편 침벽공원이다. 깎아지른 절벽에는 병풍처럼 천연기념물인 측백수림이 내려앉아 유유히 흐르는 반변천과 어우러진다. 노거수들이 밀집한 침벽공원도 고즈넉한 느낌에 젖게 만든다.

공원 안으로 들어오니 캠핑을 하던 오설(34) 씨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는 1년 전 대구에서 운영하던 태권도장을 접고 이곳에 오토캠핑장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10년간 태권도장을 운영했는데 머리가 다 셀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가끔 여기서 캠핑을 하곤 했는데 아침 물안개에 반했죠. 사람들이 이곳에서 카누도 타고 낚시도 하면서 여유를 즐기게 하고 싶어요. 5월에는 꼭 문을 열 생각입니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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