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내에서만 시험 문제를 출제하도록 한다는 정부의 방침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다. 현장에서는 학교 교육 정상화를 도모하기 위한 선행학습 금지 취지에는 기본적으로 공감하지만 교과서 내에서만 시험 문제를 내도록 하는 것이 근본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특히 고교'대학 서열화 등 근본 원인을 도외시한 채 이 방침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불만도 터져 나오고 있다.
◆교과서 내에서만 시험 문제 내라고?
대구지역 한 고교 교장은 "선행학습 금지를 위한 교과서 내 시험문제 출제 방침은 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키고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준다는 취지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고교 교사들은 시험을 교과서 속 내용으로만 출제하라는 방침이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올해 1학기 중간고사 시험 문제 출제가 마무리됐을 뿐 아니라, 1학기 기말고사에 적용하려 해도 어느 정도까지를 선행학습 범위를 넘지 않는 교과서 속 내용으로 봐야 할지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구 수성구 한 중학교 교사는 "가령 국어 수업 때 시의 운율에 대해 배운 뒤 시험 때는 교과서 외 작품을 지문으로 내고 운율에 대해 묻는 경우 정부 지침을 어긴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며 "과목별로 구체적인 출제 지침이 나와야 교사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중학교 교사는 "현재 정부 분위기로 봐서는 최대한 빨리 밀어붙일 것 같지만 일러도 2학기에나 가능할 것"이라며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세부 실행 방안을 꼼꼼히 짜지 않은 채 서두르다 보면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고 했다.
지역 한 자율형사립고 교사는 '교과서 외 출제 금지' 방침이 시험의 변별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수한 학생이 몰린 지역의 학교일수록 교과서, 특히 뒷단원 내용을 일부 포함하지 않으면 학생들의 수준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며 "각 대학들이 고교의 내신 성적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대입 준비, 제대로 될까?
고교 교사들은 이번 방침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데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교과서 내에서만 시험을 출제하라는 것은 수업을 교과서로만 하라는 의미이기도 한데 이는 고교 현실과 맞지 않다는 것.
수성구 한 고교 교사는 "상당수 고교에서 수준별 이동 수업을 통해 심화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 같은 심화학습 역시 사실상 선행학습 범주에 들어간다"며 "교과서로만 수업을 할 경우 상위권 학생들이 만족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교사는 "각 고교가 사용하는 교과서의 종류가 다른데 우리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내용만 가르쳤을 때 모든 교과서를 참조해 출제되는 수능시험에 어떻게 대비하느냐"며 "그동안 다양한 교과서를 모두 챙겨 내용을 추린 뒤 학생들에게 전해왔는데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돼 몸은 편하겠지만 마음은 무겁다"고 했다.
EBS 교재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는 이 방침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정부가 공공연히 EBS 교재의 수학능력시험 연계율이 70%라고 밝혀왔고, 사실상 고교에서 이 교재를 교과서 대신 쓰고 있기 때문이다.
달서구 한 국어 교사는 "고3이 되면 정규 수업을 EBS 교재로 진행하는 것이 현실인데 이번 방침대로라면 이 교재를 볼 이유가 없게 된다"며 "지금이라도 정부가 EBS 교재와 수능시험의 연결 고리를 끊겠다고 분명히 밝혀야 학생들이 이 교재를 보다 다시 교과서를 찾는 헛수고를 덜 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학입시 일정과 고교 교육과정이 맞지 않는 상황이어서 이 방침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많았다. 달서구 한 고교 교사는 고3 2학기 과목까지 배워야 수능시험을 칠 수 있는데 수능시험은 정작 11월에 치르는 것부터 문제라고 했다. 그는 "고2 때까지 고3 과정을 모두 끝내야 고3 때 수능시험 준비에 '올인'할 수 있기 때문에 진도를 빨리 나갈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한 뒤 고교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며 "입시 일정 자체가 정상적인 교육과정 운영을 막고 있다"고 했다.
◆정작 근본 문제인 고교, 대학 서열화 고착은 외면
중'고교 교사들은 교과서 내에서 시험 문제를 내면 선행학습이 필요 없을 것이라는 정부의 생각은 한마디로 현실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선행학습이 일반화된 것은 고교 평준화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지고 명문대 합격생을 많이 배출하는 특수목적고, 자율형사립고 등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진 탓이 크다. 이를 외면한 채 교과서 내 시험 문제 출제를 들먹이는 정부의 발상은 순진하다는 것.
수성구 한 고교 교무부장 교사는 일반계고와 달리 특목고, 자사고 경우 교육과정 편성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했다. 그는 "특목고와 자사고에서 정규 교육과정에 진행하는 고급물리, 비교문화, 국제경제 등 대학 교양 수준의 수업도 엄밀히 말하면 선행학습"이라며 "정부 방침대로 이 같은 수업을 금지할 경우 특목고와 자사고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달서구 한 중학교 교사는 정부 방침이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시험을 규제해 선행학습을 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특목고와 자사고, 각 대학은 보다 우수한 신입생을 뽑기 위해 면접, 자기소개서와 같은 각종 서류 평가 등 어떤 식으로든 더 많은 것을 익혔는지 가려낼 것"이라며 "명문대 선호 현상과 명문대 진학에 유리한 고교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바꾸는 게 근본 대책"이라고 했다.
또 다른 중학교 교사는 "이 방침이 시행되면 정부에서 각 학교를 상대로 확인 감사를 벌이고 각 시'도교육청에 위반 사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등 학교 현장이 한동안 시끄러울 것"이라며 "선행학습을 막기는커녕 학교 현장의 혼란만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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