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0일 새벽 '윤창중 성추행'이란 뉴스를 듣자마자 생각난 건 2010년 1월 스위스 취리히에서의 일이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하던 필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스위스 다보스포럼 방문을 현장 취재했다.
귀국 비행기를 타러 가기 직전, 프레스센터에서 짐을 싸던 기자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있었다. 이미 송고를 마친 이 대통령의 해외 언론 인터뷰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대변인이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대통령의 발언을 각색, 언론에 배포했다가 들통났던 이른바 '마사지 사건'이다. 이내 기자들 사이에선 대변인 사퇴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그가 귀국 '1호기'에 탑승하지 않고 따로 귀국할 것이란 소문도 나돌았다. 농락당했다는 자괴감과 함께 한국 본사에 사건 개요를 전화로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 성추행 사건과 3년 전 마사지 사건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란 점에서 닮았다.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청와대 대변인이 '주범'이란 점은 같다.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는 것도 닮았다. 청와대 홍보의 신뢰에 큰 금이 가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전자는 구중심처, '저 높은 곳'에서 이뤄진 일이고, 후자는 장삼이사(張三李四)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인 탓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핫 이슈로 떠오른 '갑과 을'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권의 신뢰는 대형 게이트로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작은 틈에서 비롯된다. 청와대가 '자진 사퇴' 형식이 아니라 굳이 '경질'로 못 박은 것도 이런 정서를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윤 전 대변인의 귀국 후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에게 일편단심 애정을 보여줬던 대구경북지역 민심은 폭발하기 직전이다. 박 대통령의 한 측근은 "윤 전 대변인이 미국에서의 진행될지도 모를 수사에서 유리한 정황을 만들기 위해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라며 "혼자 살아남기 위해 대통령을 욕 보인 셈"이라고 흥분했다. 박 대통령이 다음 달 초로 예정된 취임 후 첫 고향 방문에서 성난 민심을 어떻게 다독일지 궁금하다.
필자 역시 여러 차례의 대통령 해외순방 취재에서 현지 인턴 직원들을 만났다. 윤 전 대변인이 '가이드'라고 표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로부터 '가이드'를 받은 적은 물론 가이드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모든 초점이 'VIP'(대통령)에게 맞춰져 있는 국빈 방문에서 기자단이 그런 호사를 누릴 여유는 없다. 그들은 먼 타국에서 조국의 일을 돕는다는 자부심에 잠도 거의 자지 못한 채 공식 수행단의 일을 도왔고, 기자 또한 유학 시절 비슷한 경험을 해봤기에 그들의 입장을 공감할 수 있었다.
사건이 터진 뒤 회자되고 있는 윤 전 대변인의 언론사 시절 칼럼은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2006년 쓴 글에서 그는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과 정권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이고, 분신"이라고 밝혔다. 불과 몇 년 뒤 자신에게 닥칠 '재수 없는 일'을 예상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전형일까?
지난해 대선 직전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남행열차'라는 건배사가 유행했다. '남은 기간 행동 조심하고 열심히 일해서 차기 정부에 발탁되자'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언론인 시절의 비판의식 대신 '남행열차'만 주야장천 외친 덕에 권력의 단맛에 빠졌던 청와대 핵심 인사들의 몰락이 씁쓸하기만 하다. 이제는 '메아 쿨파'(내 탓이오)를 되뇌는 참모들을 진정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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