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새벽.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유나이티드(맨유) 감독의 고별전이 치러진 웨스트브로미치의 호손스 스타디움은 명장을 향한 존경심으로 넘쳐났다. 비록 적장이지만, 웨스트브로미치 팬들은 27년간 영국 프리미어리그에 몸담으며 그가 이룬 업적에 경의를 표했다. 그와 인연을 맺은 당대 슈퍼스타들은 존경과 축복, 아쉬움의 헌사를 남겼고 앙숙들조차도 축구계에 남긴 업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축복해준 그의 마지막 무대를 바라본 국내 프로야구 감독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프로세계에서 한 팀을 지휘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이다. 이는 퍼거슨이나 국내 프로야구 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감독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그러나 퍼거슨에게 명장의 길을 걷도록 기다려준 맨유와 언제 구단으로부터 퇴출통보를 받게 될지 불안에 떠는 프로야구 감독들과의 처지는 극명하게 갈린다.
퍼거슨이 27년간 맨유를 이끌면서 1998-1999시즌 트레블을 포함, 13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 5번의 FA컵 우승 등 무려 38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영광을 누린 데는 맨유구단의 믿음이 뒷받침됐다.
1986년 퍼거슨이 맨유 감독에 부임했을 때 맨유는 지금처럼 강팀이 아니었다. 2부 리그로 밀려날 처지까지 놓였고, 퍼거슨은 부임한 뒤 세 시즌 동안 단 한 개의 트로피도 들어 올리지 못했다. 급기야 1990년에는 경질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맨유는 퍼거슨을 내치지 않았고 퍼거슨은 그 보답으로 맨유를 강팀으로 만들었다. 주위의 가시 돋친 시선에도 오히려 맨유는 퍼거슨을 지지했고, 그 덕분에 퍼거슨은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철학을 밀어붙이며 강팀의 기반을 닦았다. 베컴, 스탐, 판 니스텔로이 등 슈퍼스타들도 그의 철학 앞에서 팀을 떠나야 했다.
구단은 퍼거슨의 요청으로 유스시스템의 요람인 '캐링턴 훈련장'을 만들었고 퍼거슨이 필요로 하는 선수를 최대한 영입해 힘을 실어줬다. 팀이 부진할 때 추스를 시간을 줬다.
1990년 FA컵을 팀에 선물한 퍼거슨은 1992-1993시즌 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맨유를 지금의 강팀, 세계 최고구단 반열에 올려놨다.
눈을 돌려 국내 프로야구를 보자. 지난해 700만 관중 시대를 열며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했지만, 명장 탄생의 기반은 부실하기 그지없다. 현역 감독 중 삼성 류중일 감독이 그나마 3년째 팀을 이끌고 있을 뿐 나머지 구단은 1, 2년차 감독이 벤치를 지키고 있다.
눈 앞의 성적에만 급급한 구단들은 감독이 팀을 정비하고 자신의 철학을 불어넣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은 탓이다.
2010년 당시 삼성 선동열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은 우리나라에 단 8명뿐(당시는 8개 구단)인 특수직이다"며 자부심을 가졌지만 재계약 첫 해 옷을 벗었다. 오랫동안 공들여 온 세대교체의 끝을 보지 못한 채였다.
류중일 감독 역시 2번의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계약이 끝나는 올해가 무척이나 중요하다"며 성적에 목 매인 감독의 운명을 언급했다.
불안한 고용환경은 스타 선수들의 진로에 영향을 줘 지도자의 길 대신 새로운 길을 찾도록 강요하고 있다. 선수시절 곁에서 지켜본 코치와 감독은 행복과는 멀어 보였을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이라면 한국야구의 미래는 없다.
30년을 넘긴 프로야구도 이젠 '제2의 퍼거슨'이 탄생할 기회를 줘야 한다. 구단과 감독, 팬이 하나가 될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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