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치적'이념적 소용돌이 속에서 사회와 경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1946년 조선의 도시들, 특히 38선 이남 대도시들의 위생 상태는 극히 악화됐다. 식량난으로 영양상태는 나빠졌고, 전염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바로 급격한 인구 유입이다.
해외에 있던 조선인 500만 명 중 200여만 명이 해방 후 1년 사이에 귀국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패망과 함께 조선을 떠난 일본인 70여만 명을 빼면 130만 명가량이 갑작스레 늘어난 셈. 일자리와 집을 찾아 대도시로 몰렸다. 서울 인구는 해방 후 1년 새 30%가량 늘었고, 대구경북지역에도 해방 이후 30만 명의 귀환 동포가 몰려들어 인구가 급증했다.
◆보건행정 정비했지만 조직뿐
일제가 물러간 뒤 미군정청은 곧바로(1945년 9월 24일) 조선총독부 조직을 정비하면서 위생국을 신설했고, 다시 한 달 뒤 임무와 역할을 확대한 '보건후생부'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위생 업무는 경찰 담당이었다. 조직도 경무국 위생과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마치 범죄자처럼 다뤘다.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이 최우선으로 여겼고, 적어도 전염병 관리에서는 야만성과 폭력성이 활개를 쳤다. 미군정청은 보건후생부를 신설, 질병관리에선 인도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조직만 만들었을 뿐 실무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여전히 경찰이 공중보건 업무를 담당했다. 이런 가운데 1946년 여름 콜레라가 터졌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저서 '현대인의 탄생' 제1장에 '미생물도 해방을 맞다'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조선총독부의 보건행정체계는 일시에 무너졌고, 그 틈에 세균과 바이러스가 굶주린 채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치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미군정청의 보건후생국 조직이 제 역할을 못하고, 현장에서 보건업무를 맡을 경찰도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콜레라가 터진 것이다. 결국 일제강점기 때보다 더 심한 참상을 겪게 됐다.
◆물가 치솟고 수재까지 터져
1946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육군성에 제출한 6월 월례 보고서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2대 재난을 언급했다. 바로 식량 문제와 콜레라였다. 가뜩이나 부족하던 식량은 그해 발생한 수재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전국적으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수재민 4만여 명이 발생했다. 43년 만의 최대 강우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수해 때문에 올해 잡곡 수확량은 1940~1944년 평균 수확량의 60%에 불과하며, 쌀 수확량도 70% 선에 그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물가는 폭등하기 시작했는데, 쌀 수요가 늘고 사재기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쌀값은 일제강점기보다 무려 10배 이상 높아졌다.
당시 미군정청 발표에 따르면, 1946년 3월 소매물가는 해방 직전에 비해 30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급격한 물가 상승 때문에 도시의 식량 사정은 갈수록 악화됐다. 당시 공무원 평균 월급이 425원이었는데, 쌀 한 말의 가격은 700원에 육박했다. 이는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한 쌀 자유시장 정책 때문이었다. 약삭빠른 장사치들이 매점매석을 일삼았고, 쌀 투기가 기승을 부렸다. 결국 미군정청은 자유시장 정책을 폐지하고, 쌀을 공출해 배급하는 배급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걷잡을 수 없는 콜레라 창궐
이런 와중에 콜레라까지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렸다. 6월 콜레라 환자가 1천212명, 사망자 651명이었는데, 10월엔 환자가 1만4천909명, 사망자가 무려 9천632명에 이르렀다. 그해 12월 최종적으로 나온 사망자는 1만1천여 명에 이른다. 사망률은 무려 60~70%에 이르렀다. 의료진과 약품이 부족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당시 조선 전체의 정규 의사는 인구 1만 명당 1명꼴이었다. 일본은 1천 명당 1명, 미국은 600명당 1명 수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 콜레라는 극심한 구토와 설사 증세를 보인다. 심각한 탈수 때문에 마치 미라처럼 바짝 말라서 죽는다. 하지만 치료에 필수적인 수액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군들이 가물에 콩 나듯이 가져다주는 것이 전부였다.
지역에선 1946년 5월 초순 청도에서 시작됐고, 6월 5일 대구지역에서 첫 환자가 발생했다. 6월 폭염과 함께 전염속도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6월 12일 대구에서 4명이 숨졌고, 경주에서 일가족이 몰살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6월 17일 대구역 대합실에서 3명, 역 광장에서 1명이 콜레라 증세로 쓰려져 승차권 발매가 한때 중단됐다. 6월 24일에는 대구시내 사망자수가 100명을 넘어섰고, 기온이 올라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됐다. 6월 28일에는 사망자 수가 25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7월 3일 경북도 내 환자 1천24명, 사망자 542명(대구 환자 700명, 사망자 391명)으로 콜레라 발병률 전국 1위였다. 그해 12월 24일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거의 잡혔을 때 대구 발병자는 2천578명, 사망자는 1천718명이었다.
◆대구지역 완전히 고립돼
당시 사람들은 여행할 때 콜레라 예방접종 증명서, 여행증명서, 검변증 등 3가지 증명서를 반드시 지참해야 했다. 검변 능력이 대구의 경우 하루 500명을 넘지 못했다. 급기야 도립대구병원과 동산기독병원이 일반 환자 진료를 중단하고 콜레라 치료와 여행자 검변에 매달렸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대구경북은 완전히 고립되고 만다.
경상북도는 6월 28일부터 도지사 명령으로 금지 구역을 정해 여행자들은 이 구역을 통과할 수는 있지만 하차하지 못하도록 했다. 금지 구역은 대구, 달성, 경산, 영천, 경주, 영덕, 영일, 청도, 선산, 김천, 예천, 문경 등 대구경북 전역이 해당됐다. 미군정청은 전염을 막는다는 이유로 차량은 물론 사람도 시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교통을 차단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 때문에 대구시민들은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겼고, 쌀 부족으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심각한 기아 상태에 놓이게 됐다. 결국 이것은 '대구 10월 사건'으로 이어진다. '대구 폭동' '대구 10'1 좌익 폭동' 등으로 불리던 이 사건은 2010년 '진실 및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재조명하면서 명칭이 바로잡혔다.
일부 좌익세력이 있었지만 대부분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대한 불만을 품은 민간인들에서 시작된 시위였다고 규정하고, 국가적 책임과 함께 유족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대구 10월 사건은 다음 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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