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겁쟁이 고양이

언젠가부터 동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동물들을 볼 때면 자꾸 우리 집 고양이들을 대입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앞다리를 번쩍 들고 서 있는 미어캣을 볼 때면 밖을 내다보기 위해 앞다리를 창문에 올리고 서 있는 앨리샤가 연상되고, 서로 몸을 깨물며 장난치는 새끼 동물들을 보면 아옹다옹하는 체셔와 앨리샤의 모습 같다.

특히 그중에서도 사자나 호랑이, 퓨마와 같은 고양잇과 맹수들은 덩치만 컸지 하는 행동들은 영락없이 우리 집 고양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하품할 때 표정이나 주변 사물에 얼굴을 문지르는 행동, 특유의 느리지만 위풍당당한 걸음걸이까지 나에겐 너무나도 친숙한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체셔가 사자를 닮았다고 말하곤 한다. 수사자의 갈기와 닮은 풍성한 목 주변의 털을 지닌 체셔가 어슬렁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닐 때면 텔레비전 속 사자의 여유로운 모습과 정말이지 닮았다.

그뿐만 아니라 체셔는 백수의 왕에 견줄 만한 품위 있는 몸가짐을 보여준다. 늘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면서 푸다닥거림을 동반하는 앨리샤와 달리 체셔는 간식을 먹으러 올 때마저도 여유롭고 느긋한 걸음걸이를 잊지 않는다. 책상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릴 때도 체셔가 앨리샤에 비해 더 육중한 몸을 가졌음에도 언제나 쿵 소리가 나는 앨리샤와 달리 사뿐히 소리 없이 내려오곤 한다.

이렇게 우리 집을 군림하는 왕인 양 늠름하게 돌아다니는 체셔이지만 비가 쏟아지는 날엔 달라진다. 하늘에서 쿠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던 고양이는 어디 가고 최대한 자세를 낮추어 허겁지겁 사라지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보게 된다. 본격적인 천둥번개로 하늘이 시끌벅적해지면 집안 깊숙이 숨어버린 체셔는 털 한 올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때만큼은 체셔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도, 간식도 소용이 없다. 우렁찬 하늘이 조용해지고 한두 시간이 더 흘러야 체셔는 삐죽이 얼굴을 내민다. 고작 몇 시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진이 빠진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어렴풋한 기억을 되돌려보면 체셔가 어릴 때 함께 살던 집은 원룸이었고, 나 역시 천둥번개를 싫어했기 때문에 비가 쏟아지는 날에 베란다와 방 사이 불투명한 유리문을 닫고 음악 소리를 크게 틀어 놓으면 거의 천둥번개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릴 때 느껴보지 못했기에 더욱더 천둥번개에 놀라는 게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다. 아쉽게도 정확히 언제부터 체셔가 천둥번개를 무서워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인지한 어느 순간부터 체셔는 천둥번개를 몹시 무서워했고 그럴 때마다 손을 뻗어 진정시켜보려고 쓰다듬고 말을 걸고 해보았지만 겁먹은 고양이에게 내 위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이렇게 체셔의 질겁하는 모습을 보며 '고양이들이 원래 천둥번개를 무서워하나?'라고 여기던 중 우리 집에 오게 된 앨리샤는 천둥과 번개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엔 어려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앨리샤는 겁먹지 않았다. 얼마 전 집 밖에서 들려오는 폭죽 소리를 천둥소리로 착각한 체셔가 침대 아래로 줄행랑을 칠 때도 앨리샤는 놀라는 기색 없이 그저 체셔만 흘깃 쳐다보곤 여느 때처럼 소파 위에서 잠을 청했다.

물론 체셔는 천둥소리뿐만 아니라 초인종 소리에도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놀라서 숨어버리곤 한다. 한없이 근엄하고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순식간에 겁을 먹고 숨어버리는 모습에 실소가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론 덩칫값 못한다 싶어서 안쓰럽기도 하다.

예전엔 나이가 좀 더 먹으면 나아지나 했지만, 아직도 이러는 걸 보면 평생 겁이 많은 고양이를 벗어나긴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내 마음은 체셔가 사자를 닮은 그의 풍채에 걸맞게 조금만 더 대범한 고양이가 되어줬으면 하고 바란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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