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이미 다문화사회에 접어들었다.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문화사회를 받아들일 수준까지 성숙하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단적인 사례가 최근 사회 이슈로 떠올랐던 '리틀 싸이' 황민우 군에 대한 악플 사건이다. 그저 베트남 출신 어머니를 뒀다는 데 기인한 인신공격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역시 다문화가정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보는 수준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지원책은 '한국인라고 해서 모두 같은 한국인은 아니다'라는 식의 선입견이 깔려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당당하게 '글로벌가정' 출신임을 자처하며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봉사하는 이들이 차츰 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제는 우리가 도울게요
이달 12일 오후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동구 신암1동). 10여 명의 어른들과 아이들이 2층 강의실에서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동부도서관이 지난달부터 매주 수요일 열고 있는 '엄마랑 함께 배우는 베트남어 교실'이다.
강사는 정혜은(27) 씨. 2007년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르엉티히엔'이란 베트남 이름을 썼던 결혼이주여성이다. 아직까지 한국어도 완벽하지는 않고, 강의 경험도 거의 없지만 수업하는 모습은 진지하기만 하다.
수강생들의 호응도 좋다. 토목 엔지니어로서 베트남 진출에 대비하기 위해 베트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이준호(45) 씨, 최근에 국제결혼을 한 베트남 아내를 위해 제대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서영균(42'강사) 씨, '대구이주여성쉼터' 직원이라 업무 능력 향상을 위해 배운다는 최현진 씨는 "원어민 선생님에게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까지 무료로 배울 수 있어 너무 좋다"고 입을 모았다.
베트남이 고향인 주부들도 학생으로 등록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결혼 8년차 김희영(31) 씨, 결혼 3년차 판틴티(23) 씨는 모두 호찌민에서 살다가 결혼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들이 모국어를 다시 배우는 이유는 아이들 교육이다. 다문화가정에서는 의사소통 문제로 자녀들이 언어발달 및 학습장애를 겪는 경우가 잦다. 김 씨는 "자기 아이를 직접 가르친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몹시 어려운 일"이라며 웃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인 김명월(42) 씨는 매주 금요일 오전이면 수성구 용학도서관으로 출근한다. 올해 3월부터 '진밍웨이와 함께하는 중국 역사탐방'이란 강의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중국 역사'문화를 가르쳤지만 학생들의 중국어 실력을 감안, 요즘에는 한국어로 강의한다.
6년 전 결혼한 김 씨는 현재 영남대 대학원(중어중문학과)을 다니고 있다. 자신의 학업과 가사일만 해도 벅차지만 늘 강의 준비에 적지않은 시간을 투자, 파워포인트나 프린트 자료를 꼼꼼히 챙긴다.
그는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데 대해 보답하고 싶어 자원봉사 강의를 시작했다"며 "학생들이 빠지지 않고 계속 수업을 나오는 걸 보면 강의가 괜찮은 모양"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또 "'스승의 날'에 수강생들로부터 식사 대접과 작은 선물을 받은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라며 "1시간의 강의시간이 너무 짧아 아쉽기만 하다"고 덧붙였다.
◆'세계문화 지도자'로 거듭나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다문화가정은 외모'문화적 차이 때문에 편견과 차별, 인권 침해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문화가정을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항 역시 '편견을 없애는 사회 분위기 조성'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다문화교육의 실현은 어느 한 쪽의 노력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결혼이주여성들이 지역사회에 직접 자국의 문화를 알리면서 교류를 확대한다면 지역사회는 자연스레 다문화 공동체로 변화될 수 있다. 결혼이주여성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성서종합사회복지관 달서다문화가족도서관이 추진하고 있는 '북(Book)적(適)북적'은 역량 있는 다문화교육 강사를 확보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결혼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세계문화지도자' 양성 교육을 실시한 뒤 이들을 다시 지역 저소득'소외계층을 위한 다문화 강사로 활용, 사회문화적 통합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다.
12일 성서복지관에서 열린 강의에는 중국'베트남 결혼이주여성 10명이 나와 윤미애(46) 강사로부터 한국사를 배웠다. 강의를 받아 적는 글씨는 삐뚤삐뚤했지만 내용은 간단하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도 헷갈리기 쉬운 조선시대 대군(大君'왕비의 아들)과 군(君'후궁의 아들)의 차이, 연산군 때의 일에서 비롯된 흥청망청(興淸亡淸)의 뜻, 기묘사화와 관련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술수 등이 잇따라 튀어나왔다.
중국 저장성이 고향으로 한국 생활 10년째라는 예핑(41) 씨는 "방송통신대에서 배웠던 내용이라 낯설지는 않지만 한국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는 듯하다"며 "강사로 나가서 중국사와 비교해 설명하면 훨씬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베트남 옌바이(Yen bai) 출신으로 이중언어 강사로 자원봉사하고 있는 부이 티 또런(30) 씨는 "한국 온 지 5년 됐지만 한국사는 처음 배운다"며 "양국 문화에 공통점이 많아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 판매점을 내도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7월까지 이어지는 총 30회의 강좌에는 한국뿐 아니라 몽골'캄보디아'태국'필리핀 등 아시아 10개국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과 교수법도 포함돼 있다. 자신의 나라와 한국에 대해서만 아는 게 아니라 '지구촌 교육 강사'로서 활동하는 데 필요하다는 뜻에서다. 성서복지관 최한구 사회복지사는 "복지관이 있는 달서구 신당동은 대구에서 결혼이민자가 가장 많은 동네라는 점에 착안했다"며 "결혼이민자들은 다양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국사회를 다양한 문화가 존중되는 다문화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댁'을 위한 강의도 다양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결혼이주여성들의 한국 적응 및 자체 역량을 키워주려는 시도 또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구 동부도서관은 '다 함께 배우는 동화극' 프로그램을 5월부터 주 1회 운영하고 있다. 영유아를 키우는 결혼이주여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동화 구연 및 우리 동요를 익힌다. 현재는 베트남'캄보디아에서 온 '새댁' 10명이 등록돼 있다.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에서 이날 열린 교육에는 1년여 전 캄보디아에서 시집 온 마오 마라(22) 씨 등 5명이 아이들과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나누며 즐겁게 합창하고 있었다. 엄마들이 "오리는 꽥꽥, 염소는 음메, 돼지는 꿀꿀, 소는 음머~" 하는 동안 아이들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강사 김정숙(44) 씨는 "젊은 이주여성 엄마들은 한글 어휘 부족 등의 이유로 책을 읽어준다든가 하는 정도의 교육은 아무래도 힘들다"며 "동화 구연, 동요를 통해 아이들과의 소통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동부도서관 노경자 열람봉사과장은 "연말에 교육을 마치면 동화구연 발표회도 열 예정"이라며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자신감 있는 가정생활에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오는 9월 국가별 자료 코너, 디지털 콘텐츠 상영관, 전시공간을 갖춘 '다문화 자료실'을 개관하는 대구 서부도서관에서는 '다문화 이웃과 함께하는 이야기 교육' '동화 사랑방' 등의 자녀 교육 프로그램이 열리고 있다. 또 지난달 25일 중국편에 이어 이달 29일에는 일본편 '세계문화체험' 행사를 연다. 다문화가정뿐 아니라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으며 일본 전통놀이 체험, 전래동화책 읽기 등을 해볼 수 있다.
이 밖에 수성구 용학도서관은 결혼이주여성 가족을 대상으로 '가족과 함께하는 책나라 행복여행' '참만남 독서여행'을 시행 중이고, 중앙도서관은 다문화가정 학생들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한 '다드림' 사업을 펴고 있다. 북구 구수산도서관은 9월부터 다문화가정 주부의 취업을 위한 'POP(point-of-purchase) 글씨 교실'을 연다.
결혼이주여성뿐 아니라 그들의 배우자를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서로 간에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 아내의 사회 활동을 오해, '내 편'이 돼야 할 배우자가 '남의 편'이 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계명대학교 이민다문화센터 최종렬(48) 교수는 "결혼이주여성들이 훌륭한 인적 자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량 강화와 함께 배우자의 배려가 중요하다"며 "바깥 활동이 잦아지면 출신국가 사람들끼리만 자주 어울리거나 가정을 소홀히 할 것으로 우려하는 배우자들이 꽤 많다"고 했다.
지난해 조사된 안전행정부의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현황'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의 외국인 주민 수(한국 국적 취득'미취득자+외국계 주민 자녀)는 각각 3만1천231명, 5만6천250명이었다. 전체 인구 대비 비율은 1.2%, 2.1%였다. 외국인 주민 지원기구'단체는 대구 46곳, 경북 59곳이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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