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법원 전자독촉시스템 악용 인터넷 불법추심 수십억 챙겨

마구잡이 지급명령 신청 업체 22곳 적발,10명 구속

#18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 교재를 구입했던 A(34) 씨는 당시 교재를 환불했지만 갑자기 불법채권추심업체에서 교재대금 채권을 양수했다고 주장하면서 교재 대금 130만원과 이자 170만원 등 총 300만원을 돌려달라며 전자지급명령을 신청하고 수시로 전화로 변제를 독촉하는 바람에 결국 300만원을 줘야 했다.

#7년 전 10만원을 주고 홍삼을 구입했던 B(35) 씨도 홍삼을 반품했지만 불법채권추심업체에서 홍삼판매대금 채권을 양수했다며 홍삼 대금 10만원, 이자 30만원 등 모두 40만원을 돌려달라며 지급명령을 신청한 탓에 40만원을 내줬다.

대법원의 전자독촉시스템을 악용해 서민들로부터 수천억원 상당의 채권을 추심한 인터넷 불법채권추심업자들이 무더기로 기소됐다.

대구지방검찰청 서부지청 형사3부(부장검사 박흥준)는 인터넷으로 대법원 전자독촉시스템에 접속해 수만 명을 상대로 전자지급명령을 신청하는 방법으로 수십억원에서 수천억원 상당의 채권을 추심한 불법채권추심업체 22곳을 적발, 불법채권추심업자 C(44) 씨 등 10명을 구속 기소하고, D(44) 씨 등 28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또 이들 불법채권추심업자에게 개인신용정보를 무단 제공한 유명 신용정보업체 지점장 E(34) 씨도 구속 기소하고, 도주한 한 명을 기소중지했다. 이를 통해 업체들이 챙긴 이익은 많은 경우 수십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2007년 1월부터 지난달까지 소멸시효가 끝나 권리실행이 불분명한 물품대금 채권 등을 헐값에 대량 양수한 뒤 다수 채무자들을 상대로 전자지급명령을 신청하고, 채무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지급명령이 확정되면 채무자의 월급, 부동산 등을 압류하는 방법으로 채권을 추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 조사 결과 이들은 '○○자산관리' 등의 상호로 불법채권추심업체를 만든 뒤 추심 직원들을 고용하고 불량채권 매매업자 등으로부터 소멸시효 기간이 지난 채권 등을 헐값에 양수한 뒤 인터넷 전자독촉시스템에 접속해 채무자들을 상대로 전자지급명령을 신청, 채무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형사고소하면 지급명령을 취하하고, 채무자들이 미처 이의제기를 하지 못할 경우 재산을 압류하거나 합의금을 수령하는 방식으로 채권을 추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채무를 변제할 수 있는 채무자들을 가리기 위해 직접 신용정보업체 지점을 운영하거나 신용정보업체 관련자들과 결탁해 무단으로 개인 신용정보를 조회한 것으로 밝혀졌다.

서부지청 형사3부 박흥준 부장검사는 "이들은 건강기능식품, 의료기기, 도서 구매 채권 등 채권 발생일로부터 5∼20년이 지나 채권회수가 어려운 채권을 대부업체 또는 자산관리업체 등으로부터 원 채권가액의 1∼10% 할인된 가격으로 매입한 뒤 채무자들을 상대로 원금에 몇 배 넘는 이자까지 포함시킨 금액으로 전자지급명령을 신청했다"며 "이러한 채권 중에는 노인이나 대학 초년생들에게 설문 또는 추첨을 빙자해 채무자들이 심사숙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시킨 것이나 원 판매자가 반품도 받아주지 않고 연락을 끊어버린 채권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서부지청은 서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인터넷 전자독촉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서민들이 지급명령신청과 마찬가지로 전자지급명령에 대한 이의신청도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방안 등 제도 개선을 건의하기도 했다.

박윤해 서부지청 차장검사는 "대법원 전자독촉시스템을 이용한 서민 상대 불법채권추심행위 단속은 이번이 처음으로 사법제도를 악용하며 진화한 불법채권추심 범행"이라며 "전자지급명령 소송 등의 방법으로 서민들을 괴롭히는 불법채권추심업자들을 발본색원해 엄단하고, 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제도 개선을 건의하는 등 서민생활침해사범 예방 및 근절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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