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치과강습소를 열고 치과교육을 한 것은 1913년 무렵이다. 당시엔 정규 치과교육기관이 없었고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치과의사가 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그 해 5월부터 8~9개월간 민제병원에서 치과강습소를 연다는 광고가 신문에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 강습소에서 어떤 내용을 가르쳤고, 강습소 출신 학생들의 진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1893년부터 제중원 원장에 부임했던 에비슨(Oliver R. Avision)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치과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다. 1921년 에비슨은 설립을 본격 추진하며 신문으로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를 이를 묵살했다. 치과의학교를 외국인이 먼저 세운다는 것은 '일본인의 체면에 관한 일'로 여겼기 때문. 총독부의원의 치과과장이던 니기라로 하여금 치과의사강습소 설립청원서를 내게 한 뒤 허가했다.
니기라가 제출한 경성치과의학교 설립신청서는 1922년 4월 1일 자로 인가됐고, 4월 15일 신입생 60명으로 개교식을 겸한 입학식을 열었다. 1922년 처음 1년은 야학으로 지내다가 1923년 수업 연한을 3년으로 바꾸었다.
1925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 제1회 졸업생 한국인 23명, 일본인 4명 모두 27명이 배출됐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경성치과의학교는 졸업생 176명을 배출했는데, 한국인은 103명(59%)으로 일본인보다 많았다.
1929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4년제로 개교했고, 1931년 일본 문부성 지정학교로 인가됐다. 전문학교로 승격된 뒤 많은 일본인 학생들이 입학했다. 1945년까지 17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다. 당초 조선인 치과의사의 양성을 위해 조선인 학생을 위주로 선발하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이 주로 공부한 학교가 됐다. 경성치과의학교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졸업생은 모두 1천635명으로 한국인 555명으로 34%였고, 일본인 1천80명으로 66%였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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