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 도핑(doping)이 끼어들 곳은 없다. 약물에 기대어 경쟁에서 불공정한 이득을 얻으려는 모든 이를 비난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지난 1월, 스포츠계에 만연한 도핑을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밝혔다.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42'미국)의 도핑 자백으로 큰 파문이 불거진 직후였다. 하지만 IOC의 경고는 금지약물보다 약효가 세지는 않은 듯하다. 당장 10일부터 러시아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타이슨 게이(31'미국)와 아사파 파월(31'자메이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또 메이저리그에서는 '슈퍼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뉴욕 양키스), 라이언 브라운(밀워키 브루어스) 등이 퇴출 위기에 놓였다. 모두 도핑에 적발된 탓이다. 스포츠 정신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도핑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봤다.
◆도핑으로 초토화된 스포츠계
세계 스포츠계에 2013년은 도핑으로 얼룩진 한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7년 연속 '투르 드 프랑스' 우승을 차지하며 '황제'로 군림했던 랜스 암스트롱부터 시작된 '전설'들의 몰락은 연초부터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1%의 희망만 있어도 나는 달린다"는 명언을 남겼던 암스트롱은 지구촌을 큰 충격에 빠트렸다. 암을 이겨내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인간승리의 표상'이었던 데다 활발한 자선 활동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의 약물 입증 보고서를 냈던 미국도핑방지기구(USADA)의 트래비스 타이거트 회장은 "스포츠 역사상 가장 교묘하고 전문적인 방법으로 약물을 복용했다"며 맹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육상계도 휘청거리고 있다. 남자 100m의 대표 주자들이 잇따라 도핑에 적발되면서다. '최강자' 우사인 볼트(자메이카)의 대항마로 꼽히던 타이슨 게이(31'미국), 아사파 파월(31'자메이카)이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불참을 넘어 선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란 시각이 많다. 최근에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여자 200m 2연패를 달성한 베로니카 캠벨 브라운(31'자메이카)과 볼트마저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다.
프로 스포츠도 수모를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간판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38'뉴욕 양키스)는 영구제명 위기에 몰려 있다. 로드리게스는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이던 2001년과 2003년 사이 금지약물을 복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통산 세 차례 MVP에 등극했으며, 지난해까지 통산 647홈런을 기록, 이 부문 역대 5위에 올라있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강타자, 라이언 브라운도 도핑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이 나타나 올해 잔여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2011년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한 그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금지약물 수사 결과 노화방지 클리닉으로부터 금지약물을 전달받았다는 증거가 드러났다. 메이저리그에선 2003년부터 엄중한 도핑테스트를 실시하고 있으며 혐의가 있는 선수에 대해서는 중징계 철퇴를 내리고 있다. 762홈런으로 통산 최다홈런 1위에 올라 있는 배리 본즈, 통산 354승 및 7번의 사이영상 수상에 빛나는 로저 클레멘스는 금지약물 복용으로 인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하고 있다.
◆'스포츠맨십의 실종' 도핑의 역사
일반적으로 도핑이란 선수가 성적 향상을 목적으로 약물을 사용하거나 특수한 이학적 처치를 하는 것을 일컫는다. 선수들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치명적 유혹인 만큼 역사도 오래됐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적발되지만 않으면 금지약물을 복용하겠다고 응답, 충격을 줬던 봅 골드만 박사의 조사(골드만 딜레마)가 미국에서 나온 것도 1982년이다.
1999년 설립된 '세계도핑방지기구'(WADA)에 따르면 1950, 60년대 스포츠계에 만연했던 약물은 흥분제인 코카인이나 각성제인 암페타민 등이었다. 이후 미식축구 선수들 사이에 근육강화제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널리 퍼졌고, 1970년대에는 너무 일반화돼 막을 방도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독 등 일부 국가는 공공연히 대표선수들에게 스테로이드를 처방하며 금메달 경쟁에 내몰기도 했다.
운동선수들이 가장 많이 쓰는 약물인 스테로이드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합성 약물이다. 국내 1기 도핑검사관인 고민철(37) 대구시체육회 여자 배구 감독은 "스테로이드는 체내 단백질 합성을 촉진해 근육을 빠르게 만들고 근력을 강화시켜줘 외국의 경우 사이클, 육상, 보디빌딩 선수들이 많이 복용한다"며 "상습 복용할 경우 심혈관계 질환을 유발하거나 심각한 간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복싱'레슬링'유도 등 체급 경기는 체중 감량을 쉽게 해주는 이뇨제의 유혹에 빠지기 쉽고, 사격'양궁 선수들에겐 혈압을 낮춰 손 떨림을 줄여주는 혈압강하제가 금지약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핑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인 계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남자 100m에서 우승한 벤 존슨이 도핑 검사에서 스테로이드가 검출돼 금메달을 박탈당한 탓이다. 이후 금지약물에 대한 검사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반(反) 도핑 규제는 기술 발전과 함께 정착돼왔다. 현재 국제스포츠기구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200종 이상의 금지약물 목록을 정하고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지난해 런던 올림픽의 경우 3천만 달러를 들여 최첨단 도핑센터를 설치하고 선수단 전체를 대상으로 무작위 혈액'소변 검사를 실시했다. FIFA 역시 내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도핑 검사를 혈액과 소변 2가지로 치러 정확성을 높일 계획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제 스포츠계의 근절 노력에도 선수들은 약물의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엄청난 돈과 명예 앞에 죄의식은 옅어지고 수법은 교묘해지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도핑 예방 강화
국내에서도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노력은 강화되고 있다. 국가 법정단체인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는 2006년 설립됐다. 세계도핑방지기구(WADA)의 규정에 따라 매년 선수'지도차 등 1만 명에게 도핑 방지교육을 실시하고 3천건 정도의 도핑검사를 수시로 실시하고 있다. WADA는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효력을 갖고 있거나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약물과 방법을 선정하고 목록화해 매년 9월 발표한다.
박병진(57) KADA 사무총장은 "운동선수가 돈'명예를 보장받는 이유는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루는 모습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라며 "고의적 도핑은 물론 정보 부족, 부주의 등으로 불명예를 안는 일이 없도록 선수 본인이 철저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프로연맹들은 KADA와 협조하면서 자체적으로 도핑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지난 2007년부터 약물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 5월, 구단별 5명씩 총 45명을 대상으로 한 도핑테스트에서는 전원 음성 판정을 받았다. 앞서 외국인선수 19명을 대상으로 한 도핑테스트 때도 약물 복용 흔적이 검출되지 않았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도핑 테스트를 지난 2009년부터 시행 중이다. 최근 무작위로 팀당 2명씩 선발해 실시한 테스트에서는 대상자 28명 전원이 음성 판정을 받았다. 채취된 시료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도핑컨트롤센터에서 분석했다. 노현욱(43) 대구FC 트레이너는 "한약재, 감기약, 영양제 같은 경우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며 복용 전 금지약물 검색을 해보도록 선수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다"며 "프로 축구에서는 아직까지 금지약물 복용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KADA에 따르면 국내 도핑 적발률은 0.5% 수준에 그치고 있다. 과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최근 금지약물에 포함되는 바람에 양성 반응을 보인 경우도 적지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몸짱 열풍을 타고 일반인들 사이에 스테로이드가 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도 스테로이드를 판다는 광고가 넘쳐난다. KADA 한 관계자는 "일반인들에 대한 도핑 테스트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약물 복용은 일시적으로 기록 향상을 가져오지만 결국 자신의 건강에 큰 해를 끼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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