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인종 분류를 바탕으로 인구조사를 해오고 있다. 1920년대 이전까지 그 분류 기준은 매우 세밀했다. 우선 흑인의 피가 4분의 3 이상 섞인 경우를 흑인종이란 큰 분류 기준으로 묶었다. 그런 다음 흑인의 피가 섞인 정도에 따라 뮬라토(mulatto, 8분의 3에서 8분의 5 사이), 쿼드론(quadron, 4분의 1), 옥토룬(octoroon, 8분의 1 이하) 등으로 세분했다.
이러한 분류 기준은 조사원들을 상당히 성가시게 했다. 부계와 모계에 걸쳐 부모와 조부모, 증조부까지 샅샅이 조사해야 하고, 흑인 피가 얼마나 섞였는지를 가려내려면 상당한 계산 능력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는 혁신적인 전환이 이뤄진다. 흑인의 피가 단 한 방울만 섞였어도 흑인종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 유명한 '한 방울의 법칙'(one drop rule)이다. 이는 과학적으로는 터무니없지만 매우 쓸모가 있었다. 단순 명쾌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국정원 직원의 댓글을 대선의 향배를 가른 결정 인자(因子)로 몰아가는 민주당의 논리가 '한 방울의 법칙'과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댓글 작업은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댓글이 대선에 영향을 미쳤는가는 다른 문제다. 과연 댓글이 대선의 향배를 갈랐을까. 그 답은 검찰의 수사를 보면 단번에 찾아진다. 국정원 심리전단은 '오늘의 유머' 등 인터넷 사이트 1천770개, '다음 아고라' 등 인터넷 포털에 총 5천333개의 글을 올렸다. 이 중 선거 개입으로 분류된 것은 73건(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직접 거론하거나 비판한 것은 37건)에 불과하다. 검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민주당의 주장은 댓글 73개가 대선의 승패를 결정했다는 것이 된다. 전형적인 '한 방울의 법칙'이다.
물론 다음 아고라의 경우처럼 국정원 직원들이 회원 탈퇴와 함께 모든 글을 삭제한 점을 감안하면 실제 댓글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댓글을 많이 올린 인터넷 사이트는 네티즌 방문 순위가 한참 아래인 '오늘의 유머' '일간베스트' '보배드림' 등이다. 그런 사이트에 올린 댓글은 영향력(영향력이 있다면)이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열심히 댓글을 올렸지만 손가락만 아팠을 것이란 얘기다. 댓글이 지지 후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지 후보의 결정에는 수많은 요인이 작용한다. 댓글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댓글이 다른 요인보다 영향력이 더 컸다고 단정할 객관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댓글이 의도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의문이다.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이끌어내려는 의도와 달리 도리어 지지는 반대로, 반대는 지지로 유권자를 돌아서게 하는 역효과를 낳지는 않았느냐는 것이다. 예컨대 국정원이 올린 '박근혜 지지' 댓글과 '문재인 반대' 댓글이 중도층의 반감을 불러와 오히려 박 후보에겐 지지 철회, 문 후보에겐 지지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국정원이 이런 효과까지 계산했을 만큼 똑똑해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댓글이 대선을 결정지었다는 것은 단세포적 발상일 뿐만 아니라 국민을 댓글 따위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한 발상이자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에 대한 모독이다.
이를 통해 민주당이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민주당은 국정원의 댓글 작업이 노골적인 대선 개입이라고 몰아붙이면서도 대선 불복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박영선 의원은 문제의 댓글이 "73개가 아니라 검찰이 73개만 찾아낸 것이 아니냐"고 했다. 검찰의 수사 결과를 못 믿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정조사가 아니라 특검으로 갔어야 했다. 국정조사는 실체적 진실 규명보다는 상대 당에 대한 정치 공세만 난무하는 저질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댓글 사건 국정조사도 다르지 않을 것이란 우려는 처음부터 나왔다. 현재 상황은 우려했던 대로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국정조사를 밀어붙였다. 그 이유는? 아마도 댓글 사건을 테마로 한바탕 '정치 굿판'을 벌여 여건을 조성한 다음 대선 불복으로 연결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억측인가? 글쎄다. '박근혜 OUT'을 외치는 촛불 주변으로 꾸역꾸역 모여드는 민주당 의원들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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