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의 기쁨을 맞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남한지역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북한지역에서는 공산군이 점령하면서 다시 종교탄압이 시작됐다. 공산당은 1946년 3월 5일부터 토지개혁에 들어갔다. 수도원이 소유한 땅은 모두 공산당에게 몰수당했다.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병원은 물론 학교와 유치원을 빼앗아 소련군 장교 숙소와 교육기관으로 사용했다. 1948년 9월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보다 본격적이고 노골적인 종교탄압이 시작됐다.
◆소련군, 일본인 가리지 않고 진료해줘
1945년 8월 18일 함흥에 들어온 소련군은 천주교 함흥본단을 점거하고 본부로 삼았다. 소련군은 거의 매일 성심의원에 찾아와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는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불안한 날들이 계속됐지만 디오메데스 수녀는 치료에 전념했다. 환자 중에는 소련군 부상병과 그 가족들도 포함돼 있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치료에는 예외가 없었다. 한 번은 디오메데스 수녀가 소련군 장교 부인의 7개월 된 미숙아 출산을 돕는 일이 생겼다. 인큐베이터가 없던 당시 수녀는 책상 서랍을 빼서 그 안에서 아기를 길렀다. 몇 달 후 아기가 정상아처럼 건강을 되찾게 되자 소련인들은 디오메데스 수녀의 의술에 감탄하며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
팔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소련군 장교가 찾아와 치료를 부탁한 적도 있었다. 이곳저곳 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 디오메데스 수녀의 치료로 상처가 낫게 됐다.
당시 도시 변두리에는 일본인 피난민들도 살고 있었다. 해방 후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일본인 여인들은 대낮에 길거리를 다닐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 '아직도 독일 여의사는 우리를 도와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밤에만 도움과 피난처를 찾아 디오메데스 수녀에게 몰려왔다. 다른 병원들은 문을 걸어 잠그며 그들을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일본 여인들과 아이들, 심지어 남자들도 밤을 틈타 성심의원의 작은 진료실로 찾아왔다.
◆죄 없는 수녀들 납치 후 강제수용소에 가둬
프룩투오사 수녀가 운영하던 원산의 '마리아 도움' 시약소는 1949년 큰 위기를 맞았다. 북한 정치보위부는 1948년 말부터 시약소에 대해 트집을 잡아 수시로 프룩투오사 수녀를 호출했다. 시약소 운영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프룩투오사 수녀는 끈질기게 무료 환자들을 위한 봉사를 이어갔다. 그들은 원산 시약소의 명목상 책임자인 디오메데스 수녀를 함흥에서 원산까지 호출한 뒤 "허가 없이 시약소를 계속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결국 공산당은 1949년 2월 25일 프룩투오사 수녀에게 시약소 폐쇄 통고서를 보냈고,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를 강제 폐쇄했다. 시약소 건물은 소련 여군들의 기숙사로 사용됐다.
급기야 정치보위부는 1949년 5월 10일 새벽 원산 수녀원 수녀들을 납치했다. 사흘 뒤에는 함흥에 있던 디오메데스 수녀를 원산으로 불러들인 뒤 납치했고, 결국 함흥에 있던 성심의원도 폐쇄해 버렸다. 수녀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원산 임시교화소에 갇혔다. 5월 17일 원산 수녀원의 한국인 수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8월 5일 서양인 수녀들은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옥사독 수용소로 옮겨져 모든 의료활동이 중단됐다. 한국인 수녀들은 함흥과 원산 교화소에서 풀려나자 남으로 탈출했다.
서양인 수녀들은 무려 4년 6개월가량 강제수용소에 갇혔다가 1953년 11월 18일 옥사독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이들은 평양을 거쳐 이듬해 1월 8일 국경을 넘은 뒤 8일간 쉬지 않고 열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독일인 신부, 수사, 수녀 69명 중 19명이 숨지고, 6명이 행방불명됐으며, 살아남은 44명만이 무사히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피란생활과 대구 정착
한국인 수녀들은 사복 차림으로 남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1950년 12월 6일 미국 국적 배를 이용해 원산항을 떠난 수녀 8명과 수사 7명은 12월 9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탈출한 수녀들과 만나 부산 피란생활을 시작했다. 육군병원에서 근무하거나 미군들의 삯빨래와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51년 10월 18일 독일 툿징의 베데딕도 수녀회 모원은 오트마라 암만 수녀를 한국에 다시 파견해 이들과 다시 만나도록 했다. 오트마라 수녀는 중립국인 스위스 사람으로 이미 1928년부터 1935년까지 북한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독일 툿징의 모원으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피란살이를 하던 수녀들은 1951년 10월 22일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의 도움으로 현 중구 남산동 천주교회 내 작은 집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됐다. 일 년 뒤인 1952년 10월 왜관 수도원 디모테오 몬시뇰의 도움으로 현 중구 공평동에서 버려진 일본 집 한 채를 사들여 분원 터를 마련해서 10월 12일 이사했다. 그로 인해 남한의 첫 분원이 생겼다.
◆무료 시약소 안토니오의원 문을 열다
대구로 온 수녀들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북한 주민과 전쟁으로 집과 토지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를 떠돌며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녀들은 1953년 2월 중구 공평동 분원 안에 작은 규모의 무료 시약소인 '안토니오의원'을 열었다. 현 파티마병원의 주춧돌인 셈이다. 수녀들은 대문 가까이에 방 하나를 터서 집 한 채를 이어 지은 뒤 작은 빈민 약국을 내고, 진찰대 한 개를 마련해 안토니오의원이라고 불렀다. 의원을 계속하려면 의사 면허증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트마라 수녀는 당시 경북대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스위스 여의사 메스메르를 초청해 진료를 보게 했다.
이 밖에 외부 직원은 없었다. 박정덕 수녀가 진료를 했고, 오트마라 수녀가 옆에서 도왔다. 이화련 수녀가 육군부대에 다니면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간호사 일을 도왔다. 진료과목은 내과, 외과, 이비인후과 등이었지만 아픈 곳 어디든지 무료로 진료해주었다. 하루에 5~10명 정도 진료를 했다. 안타깝게도 안토니오의원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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