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한우의 소통 비타민] 학문 종속 부추기는 한국연구재단

얼마 전 영남대에서 작은 국제 세미나가 열렸다. 필자가 공동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JCEA(Journal of Contemporary Eastern Asia)의 Scopus 등재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행사였다. Scopus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A&I(Abstracting & Indexing) 서비스인데, 이 Scopus에 다수의 저널을 등재시키고 있는 스프링거(Springer)의 아시아 담당자가 영남대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같은 날 한국연구재단에서도 국내 학술지의 Scopus 등재를 위한 특별 세미나를 열었다.

Scopus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엄청나다. 저널을 발행하는 학회 및 출판사가 5천여 곳에 이르고, 여기에서 발행하는 저널은 2만 종, 논문은 5천만 건에 이르며, 수록된 논문의 초록과 참고 문헌, 인용 정보 등을 온라인으로 제공한다. 어떤 저널이 A&I 시스템에 등재되면 세계 어느 곳에 있더라도 그 저널에서 발행하는 다양한 서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물론 Scopus 외에도 다른 A&I 서비스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Scopus는 WoS(Web of Science)와 더불어 가장 유명하다.(참고로 Wos는 과학기술 분야의 SCI, 인문학 및 사회과학의 A&HCI, SSCI 등을 운영한다.)

A&I 서비스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Scopus와 WoS(SCI) 등재 열풍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과학기술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설립한 공공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 외국 기업이 운영하는 민간 서비스 등재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이날 특별 세미나에서 재단은 Scopus 한국 저널 선정위원회의 운영 경과에 대해 발표하고 엘스비어(Elsevier) 본사로부터 한국 저널의 Scopus 선정 현황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재단은 이러한 행사가 우리나라 연구개발 기반의 진흥과 학술지의 국제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의문이 따른다. 특정 상업적 A&I 서비스에 등재되는 것을 두고 공공기관이 직접 나서서 한국 저널의 공과(功過)를 말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러한 정책은 '연구 지원 글로벌 리더'로 발전하고자 하는 한국연구재단의 비전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재단 홈페이지를 보면, 한국연구재단은 미국연구재단(NSF), 독일연구재단(DFG) 등 세계적 R&D 지원 기관을 능가하는 전문 기관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정책을 세계 각국이 벤치마킹할 만큼 성장하여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Scopus 등재 정책은 이런 포부를 무색하게 한다. 스스로 세계를 개척하지 않고, 또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없이 어떻게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연구재단이 경쟁자로 언급한 미국 NSF는 상업적 A&I 서비스의 대안으로 펜실베이니아주립대가 개발한 Open Access 기반의 CiteSeer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북미, 일본의 공공기관들도 코넬 대학교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arXiv.org를 운영하면서 새로운 A&I 플랫폼을 선보였다. 선진국의 이러한 노력은 학문 연구가 상업적 A&I 서비스에 종속될 수 있는 위험성을 막고, 학문 연구의 공공성을 확보하면서 개방적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해외의 우수한 기관들이 이러한 공익적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한국연구재단은 자국에서 발행되는 학술지와 논문을 특정 A&I에 등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재단이 연구공동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번 영남대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크게 공감했다. "JCEA의 독자층을 넓히기 위해서 Scopus 등재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특정한 A&I 서비스에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다국적 출판 기업의 논리에 한국 학술지의 생사여탈권을 맡기는 어리석은 일이다." Scopus 등재 정책이 한국 학술지의 환경과 학문의 풍토를 더 황폐화시킬까 우려스럽다.

영남대 언론정보학 교수·아시아 트리플헬릭스 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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