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보리 등 주곡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강원도 산골마을은 주식이라고 할 정도로 감자를 많이 생산했다. 그래서 강원도 두메산골에는 감자를 주 재료로 한 다양한 향토음식들이 어느 곳보다 잘 발달되어 있다. 동해 감자옹심이는 강원도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통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반죽을 만들고 밀가루 수제비처럼 별식으로 해 먹었던 이 감자옹심이는 웰빙 바람을 타면서 강원도 전역에서 맛볼 수 있는 토속 관광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감자는 식품영양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음식 재료여서 수입산을 능가할 수 있는 향토음식 산업화의 좋은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감자옹심이는 넉넉한 강원도 인심
강원도 동해시 묵호항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동해시 천곡동 1028번지 향토음식점(대표 이옥녀'59)을 찾았다. 강판에 통감자를 갈아 옹심이 반죽을 하고 메밀국수 면발을 홍두깨로 직접 밀어 손으로 만들어 내는 이 식당은 감자옹심이와 메밀전병이 전문이다. 올해로 20년 전통을 갖고 있는 이 집은 동해 시내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동해시청 공무원들이 점심식사 단골로 삼을 정도로 자자하게 소문나 있다.
식당 안에 들어서면 커다란 안반 위에 메밀 면발을 홍두깨로 밀고 있는 주인 이옥녀 씨를 만나게 된다. 이 씨는 큰 보자기 위에 메밀 반죽을 두고 넓게 펴나간다. 반죽이 붙지 않도록 노란 옥수수 가루를 뿌려가며 척척 접은 다음 국수 칼로 썩썩 썰어 내는 모습은 강원도 두메산골 아낙네의 모습 그대로다. 허옇게 메밀가루가 묻은 손을 비비면서 손님맞이 인사를 한 이 씨가 홍두깨와 안반을 밀쳐 두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때 이른 점심 때인데도 손님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고향은 경상도지만 결혼하면서 강원도에서 살게 됐다는 김유정(50)'안영애(53) 씨는 "가벼운 점심으로는 감자옹심이가 딱"이라며 옹심이 예찬론을 펼쳤다. "감자옹심이는 아무런 첨가물 없이 감자 그대로를 갈아 만들어서 소화가 참 잘되지요. 구수하고 부드러워서 먹기도 아주 편합니다." 한 달에 대여섯 번은 이 집을 찾는다는 두 사람은 "큰 냉면 대접에 가득 담아 주는 옹심이가 푸짐해서 좋다"고 했다. 점심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자 주방에서 혼자 일을 하는 이 씨를 대신해 손님들이 자신의 감자옹심이를 직접 날랐다. 여유롭고 넉넉한 강원도 인심이 살아 숨 쉬는 광경이다. 손님들은 "이 집이 강원도 감자옹심이의 원형을 옛 그대로 보여 주는 유일한 집"이라고 귀띔했다.
◆배를 씹는 듯 아삭한 감자옹심이
감자옹심이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통감자를 강판에 갈아 물기를 짜내고 손으로 주물러 오랫동안 치대면 찰기가 생겨서 반죽이 된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반죽을 치대면 끈기로 어우러지는데 이때 펄펄 끓는 옹심이 육수에 반죽을 손으로 적당한 크기로 떼어서 넣고 한소끔 끓이다가 굵직하게 썰어 둔 메밀 국수가락을 넣고 한 번 더 끓여 내면 된다. 이 씨는 감자 반죽에 직접 손으로 밀어 낸 수제 메밀면을 추가해 감자옹심이와 메밀칼국수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도록 했다. 국물은 굵은 멸치를 오랫동안 삶아 구수하게 우려낸다. 잘게 채 썰어 넣은 애호박과 홍고추가 감자옹심이 국물 맛을 달착지근하면서도 칼칼하게 해 준다. 김 가루와 볶은 깨소금이 고명으로 얹힌다.
"한번 잡숴 봐요. 뜨거워서 조심해야 돼요." 옹심이 한 덩이를 떠 입 안에 넣으니 혓바닥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깨소금과 김 가루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 감칠맛을 낸다. 감자 전분이 아닌 통감자로 반죽을 했는데도 수제비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난다. 희한하게도 옹심이 건더기는 배를 씹을 때처럼 아삭거린다. 밀가루 수제비하고는 다른 처음 느껴 보는 식감이다. 노란 옹심이와 함께 끓여 낸 연갈색의 매끈한 메밀 칼국수 면발을 골라 건져 먹는 것도 이 집 옹심이만의 재미다.
이 씨는 "금방 감자를 갈아야 옹심이 맛이 더 좋아진다"고 했다. 감자를 기계로 한꺼번에 많이 갈아 두면 맛이 덜하다는 것. 이 때문에 그는 매일 수시로 감자를 간다. 손님상을 차려 낸 이 씨는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홍두깨를 들었다. 비닐봉지에 꽁꽁 싸매 둔 메밀 반죽을 꺼내서 안반 위에 얹고 홍두깨를 굴리면서 연신 밀어 댄다. 반죽은 전날 만들어 숙성시켜야 찰기가 강하고 잘 펴진단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쫄깃한 면발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널찍한 안반에다 반죽을 얹고 서까래 같은 홍두깨를 굴리는 이 작업은 고된 일임에 틀림없지만 이 씨의 얼굴에는 힘든 내색이 없다.
"40년은 족히 됐지요." 이 씨가 끝이 둥근 국수 칼을 내밀었다. 그가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칼이다. 국수 칼은 홍두깨, 나무 안반과 함께 이씨의 3대 보물이다. 전통 주방기구들을 아직까지 생업에 이용하고 있는 이 씨의 모습이 정겹고 반갑다.
◆산업화 손쉬운 향토음식 조건 갖춰
시간을 두고 공을 들여 만든 감자옹심이 한 그릇 가격은 5천원이다. 이곳에선 다른 강원도 향토음식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고추장을 풀어 매콤하게 끓여 낸 강원도식 장칼국수와 감자를 갈아 프라이팬으로 부쳐 낸 감자빈대떡, 그리고 메밀가루를 반죽해 고소하게 구워 낸 메밀전 등도 모두 5천원이다. 특히 맛깔스러운 갓김치를 속으로 넣어 만든 메밀전병은 이곳의 별미다. 각종 야채를 속으로 넣은 만둣국과 메밀국수, 술안주로 어울리는 두부구이도 마찬가지다.
감자옹심이는 강원도 정선군 백복령에 특산음식단지가 조성돼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동해 사람들은 애써 이씨 집을 찾는다. 이 씨는 감자를 비롯해 고추, 호박, 무, 파, 배추 등을 직접 농사를 지어 식재료로 이용한다. 밑반찬으로 내는 김치도 직접 담근다. 남편 김재영(68) 씨가 정선군 인계면에서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고 있다. "장칼국수를 옛날에는 '가숙'이라고 했지요. 시어머니는 '오늘 저녁엔 쌀이 떨어졌으니 가숙 해먹자'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이씨가 만드는 강원도식 장칼국수는 밀가루 국수인데 붉은 고추장을 풀어 국물을 만든다. 메밀전병은 메밀을 엷게 풀어서 프라이팬으로 넓게 부쳐낸 뒤 갓김치를 채운다. 김밥처럼 말아서 만드는데 갓김치의 짭조름함과 메밀전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독특한 맛을 낸다.
뛰어난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지난해 강원도와 동해시가 추천하는 '착한가격 모범식당'에 선정되기도 했다.
동해 감자옹심이의 산업화 가능성은 높다. 국수 등 면류처럼 '한그릇' 음식인데다 주재료인 감자의 영양학적 가치가 밀가루보다 월등하게 높기 때문이다. 또 부재료를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다. 일본 소바나 베트남 쌀국수처럼 삶은 돼지고기와 새우 등 해산물로 국물을 보강하고, 볶아 낸 산송이와 능이, 표고 등 다양한 버섯류를 고명으로 간단히 추가해 고급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응용 메뉴가 다양하게 개발된다면 강원도산 감자의 청정성 등 우수성을 부각시킬 수 있고, 감자옹심이 단일 음식으로도 프랜차이즈 소재로서 산업화 가치가 높다.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e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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