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 날 정도로 특별하거나 재미있는 게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냥 35년을 학교에서 가정 선생님으로 지냈고 58세에 명예퇴직해서 이것저것 배우며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할머니라고 했다.
겸손이었다. 그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마다 그가 그린 그림들로 가득했고 마루에는 방금 치다 만 듯한 기타와 디지털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문화공간에 온 듯했다.
김숙한(66'대구시 수성구 범어4동) 씨. 부끄럽다며 사양하던 그가 딱 하나 자랑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70세가 훌쩍 넘은 할머니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란다. 할머니들이 정말 열심이어서 그림을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범물성당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정도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김 씨의 조금은 쑥스러우면서도 자랑스러운 은퇴 후의 삶을 들여다봤다.
-집안이 마치 갤러리 같다.
"은퇴하고 난 후 이것저것 배우기도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려봤다. 그러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그림이었다. 혼자 독학을 하며 손자 얼굴도 그리고 풍경도 그렸다. 손자 얼굴이 캔버스에 솟아오를 때의 기쁨이란 대단하다. 아들 딸들이 실물과 똑같다며 좋아할 때면 그림 그리느라 생긴 어깨와 팔의 통증도 잊을 정도다. 연습 삼아 그린 것이 20여 점이 넘어 집에 걸어두게 된 것뿐이다."
-그림을 특별히 배웠나.
"아니다. 은퇴 후 하고 싶어서 혼자 공부했다.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그림이다. 지난해 3월 성당에서 할머니 그림반을 처음으로 운영했을 때 주변에서 걱정스러워했다. 그런데 1년도 되지 않아 전시회를 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평균 나이 75세 할머니들이다. 그림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 하고 싶다는 열의만 있으면 된다."
-손자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할머니라고 했다. 비결이 있나.
"손자가 아직 어리다. 집에 오면 피아노나 기타를 치면서 함께 동요를 부른다. 가끔은 손자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 아주 좋아한다. 손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내가 만든 동영상을 보는 것이다. 가족 여행을 가거나 행사가 있을 때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해 한 편의 영화처럼 만든다. 음악도 넣고 제목도 넣어 멋진 영상을 만들어 보여주면 푹 빠져버린다. 집에만 오면 손자는 TV 앞으로 달려가 출생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영상물들을 꺼내서 본다. 그것으로 손자와 나는 아주 가까워진다. 특별한 즐거움이다."
-영상작업에 애정을 보이는 이유가 있는가.
"세상의 할머니들은 언젠가 손자들과 작별을 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손자들이 할머니의 존재를 오랫동안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래서 손자를 그리기 시작했고 영상물을 남기게 됐다. 할머니가 만든 영상물을 보면서 그것을 만들며 즐거워했을 할머니를 기억해 주길 원한다. 또 할머니가 직접 그린 그림을 보며 할머니를 오랫동안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잊힌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영상물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나.
"컴퓨터를 만질 줄 알면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몇몇 기능만 익히면 된다. 1시간만 배우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가족들에게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고 스스로 말했다.(웃음) 이유가 궁금하다.
"이래 봬도 아들 딸들에게 인기가 좀 있다. 호호. 딸이나 아들 내외가 여행을 갈 때면 꼭 나와 같이 가길 원한다. 여행 후 기록물을 멋지게 담아 영화처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필요해서 나를 찾으니 고마운 것 아닌가. 나이 들어도 젊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냥 모셔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하면 도움이 되고 즐거운 사람이어야 한다. 늙음에 대한 나의 철학이다."
-학교를 일찍 그만두었다.
"갑상선에 이상이 있어 수술하고 몸조리를 하다 보니 학생들에게 피해가 갔다. 그래서 미련 없이 접었다. 35년 동안 학교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학생들이 사랑스러웠고 학부모들과의 소통도 아주 잘됐다. 월급이 적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학생들과 이렇게 즐겁게 보내는 것도 고마운데 돈까지 받아서 늘 감사했다. 58세에 병을 얻어 준비 없이 교직을 떠나게 됐다. 인생이라는 게 어쩌면 사건의 연속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퇴직 후 처음에는 무엇을 했나.
"건강을 돌보면서 다른 퇴직자들이 하듯 스포츠댄스도 배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밖으로 돌다 보니 나만의 조용한 시간도 보내고 싶어졌다.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기타와 피아노를 다시 하게 됐다."
-기타와 피아노는 그 나이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악기는 아니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을 가서 쓰러졌다. 그리고 1년 휴학을 하는 바람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퇴직하고 나니 그 꿈이 다시 생각났다. 그래서 다시 피아노를 시작했고 기타는 어릴 때부터 오빠에게 배운 것이었다. 그동안 직장생활 하고 살림 사느라 접어두었던 것을 다시 만지니 젊으므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악기의 좋은 점은?
"인생은 짧다. 악기 하나 정도는 배워서 모두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악기는 나에게 위로이며 즐거움이다. 기타도 30년 이상 치지 않으니 아무것도 기억에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학원에 3개월 정도 다녔다. 기타를 안으면 가슴께에서 소리가 나온다. 그것이 기타의 매력이다. 피아노도 새롭게 배우고 있다. 외롭고 쓸쓸한 날 나만의 연주회를 갖는다. 악기는 언제나 거기에 있는 친구와 같다."
-개인 전시회를 열어도 좋겠다.
"내 나이 칠십이 되면 한번 해보고 싶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전시회 오픈할 때 기타 연주를 하면 멋질 것 같기는 하다."
-소원이 있다면.
"건강에 늘 자신이 없다. 건강해서 음악과 그림과 함께하는 멋있는 할머니로 오래오래 기억되고 싶다. 딸은 늘 호기심이 너무 많아 탈이라고 나무라지만 호기심 많은 예쁜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다. 욕심이 과한가. 호호."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강습현
(2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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