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중학교 2학년 때 수술해준 환자다. 오른팔과 다리가 뻣뻣해지고 얼굴과 눈이 돌아가는 경련을 한다고 엄마와 함께 왔었다. MRI 사진 촬영을 하니 엄지손가락 크기의 종양이 왼쪽 전두엽(前頭葉)에 있었다. 수술해서 종양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병리조직검사상 희돌기교종(稀突起膠腫)이라는 악성도가 낮은 암이었다.
그 후 한 번씩 외래에 와서 진찰을 받고 항경련제를 타 가곤 했다. 얼마간 엄마와 같이 오다가 혼자 왔다. '엄마와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잘 계시냐? 엄마하고 같이 오면 좋겠는데. 네 학교 복학 문제도 상의하고…." "에이, 이제 저도 다 컸는데요. 혼자 병원에 올 수 있어요."
그 후에는 아주 불규칙적으로 병원에 왔다. 몇 년에 한 번씩 불쑥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때마다 시행한 추적 MRI 검사상에 종양 재발 소견은 없었다. 이번도 아마 2년 만인 것 같다. 시간이 너무 늦어 MRI만 찍도록 하고 결과는 내일 보기로 했다.
다음날 외래를 보던 중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이름을 부르자 과일 상자를 든 앳된 흑인 병사와 함께 들어와 앞에 앉는다. "며칠 후 우리 결혼해요. 인사하려고 과일을 사들고 왔어요."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습니다." 그녀는 우리나라 말로, 흑인 병사는 영어로 말하면서 과일 상자를 건넨다. 내가 장인이라도 되는 듯 진지한 표정들이다. 축하한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붉은색을 띤 망고가 줄지어 있다.
컴퓨터 화면에 떠있는 MRI 사진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종양의 재발은 없다고 설명해 준다. "수술한 지 15년이 지났으니 이제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2년에 한 번 정도는 병원에 오는 것이 좋겠다." 사이좋게 두 사람이 진료실을 나간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녀가 왜 결혼 승낙을 얻으려는 듯 상대를 나에게 데리고 왔을까? 흑인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까?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일을 누군가로부터 진정한 축복을 받고 싶었는데 찾아보니 없어 나에게 찾아온 것인가?'
어릴 적 수술한 환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본의 아니게 보게 된다. 육체적 장애가 없음에도 마음의 상처 때문인지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병만 고치면, 신체적 장애만 없으면 결과가 좋았다고 발표도 하고 논문도 써왔지만, 그들의 마음에 생긴 커다란 흉터를 무시했던 것 같다. 의사가 어찌 육체만 고쳐놓고 '내 할 일 다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혼할 두 사람에게 신의 축복이 듬뿍 내리어 행복한 삶이 영속되기를 기원한다.
임만빈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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