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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행복편지] 국수 먹기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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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향긋한 바람이었을 거예요. 향기로우면서도 구수한 바람이 뺨을 스칠 때쯤 난 5일장 맨 뒷자리에 자리 잡은 국숫집으로 향하곤 했지요. 여름의 무더위가 어느 정도 식을 즈음이었으니 아마 이맘때쯤일 거예요. 가을이라 해도 햇살은 따가웠으니 그 기운으로 알곡들은 더 꽉 차고 과일은 더 단단해지는 때였으니까요. 국숫집으로 향하는 시간은 서너 시가 지날 무렵이었는데 서서히 장이 파해가는 시간이었어요. 유년의 우리 마을 5일장은 다른 지역보다 좀 빨리 파장을 맞는데 그건 특산물인 모시를 내다 파는 모시장이 이른 새벽에 서기 때문이래요. 새벽 불빛에서 봐야 흰 모시의 가늘기가 얼마나 고운지 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래서 장이 서는 1, 6일은 늘 덜 깬 잠으로 아침부터 병든 닭처럼 밥상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게 다반사였지요.

아무튼 아침에 뽑아서 긴 젓가락 같은 막대기에 양쪽으로 갈라서 넌 국수가 적당하게 마른 그 시간쯤 우린 국숫집을 어슬렁거리며 주인아주머니 몰래, 널어둔 국수의 끝을 톡톡 잘라 먹었는데요. 그 맛이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거예요. 우리 악동들은 그 시절 한동안 마른국수 끊어먹는 재미에 푹 빠졌는데요. 국숫집 아주머니는 맘이 좋으셔서 우리가 차양처럼 가려진 국수 가락에 몸을 숨기고 국수를 톡톡 끊어 입에 물고 있으면 "안으로는 들어오지 말고 바깥에 있는 것들만 손대야. 널어 논 안쪽으로 들어오면 다 끊어져서 팔도 못햐" 하며 소리 지르셨어요. 그럼 우리 악동들은 '어떻게 아셨지? 분명 몰래 숨었는데?' 하고는 혼비백산 도망치곤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스운 광경이죠. 햇살에 비친 투명한 국수 사이로 우리의 실루엣이 비친다는 걸 우린 모른 거죠.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한발 한발 디디며 국수에 손대는 우리의 모습이 아주머니에게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였을까요. 그때 도망치던 모습이 내 뇌리 속에서 여전히 선명한데, 숨 몰아쉬느라 벌린 입 안에는 침과 범벅이 된 국수 그리고 가을 햇살이 한 가득이었어요. 한참을 뛰어서 학교 담벼락에 기대어 우리끼리 깔깔거리며 웃던 모습도 눈에 선하네요. 흰 국수 가락에 닿은 햇살은 들판의 벼처럼 황금빛으로 물들곤 했는데 우리가 먹었던 마른국수는 황금 웃음과 추억으로 소중한 삶의 영양소가 돼 있네요.

그래서 이맘때쯤이면 그 마른국수가 먹고 싶어져요. 시중에서 파는 멋들어지게 포장된 국수가 아닌 햇살에 온몸 다 내주고 뻣뻣하게 자존심 세우며 마른, 국수 말이에요. 손님 손에는 신문지로 둘둘 말려 팔리는 마른국수. 이제 어디에서 그런 국수를 살 수 있고 맛볼 수 있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국수 하면 또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손으로 정성스럽게 반죽해서 밀대로 밀고 종종종 써는 손칼국수네요.

경상도 사람들은 유독 손칼국수를 좋아들 하죠. 그야말로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국수인데요. 밀가루를 치대고 반죽해서 밀대로 민 다음, 칼로 썰어 만든 국수이기 때문에 손칼국수라고 하겠죠. 질 좋은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우려낸 국물에 국수를 넣고 삶다가 길쭉하게 썬 배추를 넣어 다시 한소끔 끓여낸 국수. 조선간장에 고춧가루와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파, 풋고추를 송송 썰어 넣어 만든 양념간장을 한 숟가락 넣어 먹으면 그야말로 속이 다 후련하고 개운하죠.

국수는 중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진 음식이라는데요. 몇 년 전인가 '누들로드'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국수의 역사를 시작점에서부터 따라갔었지요. 3천 년 전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 먹었고 서양의 스파게티로 이어지는 국수의 역사는 마치 인류의 역사처럼 참 흥미로웠어요. 특히 국수가 처음 음식으로 만들어졌을 때는 아주 귀해서 상류층에서나 먹던 음식이었다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가장 서민적인 음식으로 되었군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 맛난 국수를 먹을 수 없었다면 우린 인생에서 한 가지의 행복을 누릴 수 없었을 테니 말이에요. 고려시대에는 귀한 음식이어서 제사나 잔치 등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었지만 조선시대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에는 '달걀을 밀가루에 섞어 반죽하여 칼국수로 하여 꿩고기 삶은 즙에 말아서 쓴다'고 소개될 만큼 점점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지방마다 넣는 재료나 방법에 따라 '잔치국수, 유두국수, 손칼국수, 팥칼국수, 올챙이국수, 생선국수, 고기국수, 장칼국수, 콩국수, 비빔국수, 메밀국수, 막국수….' 막 떠오르는 대로 적어 봐도 열 가지는 족히 넘으니 국수의 변신은 끝이 없는 거 같군요.

아, 이 볕 좋은 가을날, 국수 어떠세요? 시원하고 맑은 멸치국물에 조물조물 무친 신 김치와 호박볶음, 계란지단이 맛깔스럽게 올라간 잔치국수나 할매, 엄마의 손맛이 깊은 손칼국수, 태양초고추장과 식초의 새콤한 맛이 별미인 비빔국수. 가을은 입맛 돋우는 국수 먹기 딱 좋은 날이에요.

권미강/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홍보 프로듀서 kang-mom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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