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자살/설흔 지음/ 단비 펴냄.
조선 12대 임금 인종(仁宗'이호)의 치세는 1년도 되지 않았다. 1544년 11월 20일 왕위에 올랐고, 1545년 7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대략 8개월 며칠을 임금으로 지냈을 뿐이다. 1515년생으로 31세였다. 그는 어째서 그렇게 빨리 죽었을까.
실록은 아버지인 중종(中宗)이 죽었을 때 지나치게 슬퍼한 것을 그의 사망 원인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실록은 이호가 아버지인 중종이 세상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난 1545년 2월까지도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발 식사를 해야 한다'거나 '몸조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간청하는 신하들의 글이 무수히 많다. 인종이 제대로 먹지 못해 허약해졌고, 병이 들어서 약조차 '거부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독살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계모인 문정왕후가 독을 넣은 음식을 먹게 했다는 것이다. 인종은 어떻게, 왜 죽었을까?
소설가 설흔은 '인종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의 죽음을 선명하게 밝혀줄 역사적 자료가 없다는 데서 출발한 작가의 가설은 '인종, 즉 이호가 권력과 의(義) 사이에서 길을 잃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작가는 인종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배경을 사료와 상상력을 동원해 치밀하게 엮어 간다. 그 과정에서 '우애'를 강조하고 죽은 아버지, 칼을 겨누는 의붓어머니 문정왕후, 스승 조광조의 근사록이 씨줄과 날줄로 등장한다.
이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무려 40여 년을 왕위에 머무른 아버지(조선 11대 임금 중종) 곁에서 20년 넘게 세자로 지냈다. 미욱한 곰처럼 보이지만 실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있는 여우이자 삵 같은 아버지와 경계의 칼날을 겨누는 의붓어머니 문정왕후와 이복동생 경원대군 사이에서 이호는 기나긴 고뇌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죽음에 직면한 아버지 중종은 '너에게 권세를 물려주겠다. 우애! 우애를 잊지 마라'라고 당부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친애했던 막내아들이자 이호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의 목숨을 걱정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왕위에 오른 모든 왕이 동생들을 죽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우애를 잊지 마라'는 아버지의 유언과 이복동생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의붓어머니 문정왕후의 끝없는 '가족애'에 대한 호소는 권좌에 오른 이호를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간다.
이호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 사이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도(道)와 자신을 둘러싼 관계 사이에서 갈등한다.
아버지 중종은 이복형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후 이복동생 견성군을 역모죄로 죽였다. 물론 아버지는 이복형을 몰아내고 왕이 되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권좌를 지키기 위해 이복동생을 죽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그들의 죽음 앞에 식음을 전폐하는 지극한 슬픔을 드러내면서 '세상은 이렇게 굴러가는데, 나는 어쩔 수 없구나. 연산을 내몬 그들(반정 공신)이 나를 내몰지 못할 것인가'라고 탄식했을 뿐이다.
그러나 과연 아버지는 정말로 그들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정말로 대소신료들의 강압에 밀렸을 뿐일까. 아버지가 견성군을 죽게 내버려 둔 것, 이듬해에 신원한 것, 그 과정에 내내 눈물과 침통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모두 철저한 계산에 따른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는 내게 권력을 물려주면서 '우애를 잊지 말라'고 당부함으로써, 애초부터 불가능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닐까. 권세를 지키자면 우애를 버려야 하고, 우애를 지키자면 권세를 버려야 하는 질곡으로 나를 밀어 넣은 것은 아닐까. 권세도 우애도 지킬 수 없는 처지로 나를 몰아넣고는 돌아서서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 중종이 세상을 떠난 뒤, 이호는 권좌에 오르지만 의붓어미 문정왕후의 전횡에 어정쩡하게 대처할 뿐이다. 권세를 지키자니 가족의 도를 버려야 하고, 가족의 도를 버리자니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거부해야 하는 지경인 셈이다. 그 와중에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마비가 잦아지지만 이호는 이를 숨긴다. 의지할 데 없는 이호는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 중종이 내친 조광조의 '근사록'에서 위안을 얻는다. 근사록은 문정왕후와 대신들, 그리고 자기 내면의 갈등으로 지친 이호에게 유일한 위로와 안식이었다.
근사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도를 세워서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서 부드러움과 강함이라 하고, 사람의 도를 세워서 인과 의라 한다.'
이호는 근사록이 가르치는 세상과 자신이 갇힌 세상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다. 210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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