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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人 세계in] <18> 권병하 말레이시아 헤닉권 코퍼레이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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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국왕 백작 작위 한국인 1호

권병하 회장이 생산 공장을 찾아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권병하 회장이 생산 공장을 찾아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두바이 빌딩 건설 현장을 방문해 공사 책임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권병하 회장.
두바이 빌딩 건설 현장을 방문해 공사 책임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권병하 회장.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말레이시아 국왕으로부터 '다토'(Dato'백작 또는 수장을 의미) 작위를 받은 한국인 기업인이 있다. 그가 세운 기업은 말레이시아 정부가 주는 수출대상을 받았고 말레이시아 최고의 중소기업으로 선정됐다. 말레이시아인들은 '다토 권'이라 부르며 그를 존경한다. 그는 헤닉권 코퍼레이션의 CEO 권병하(65) 회장이다. 30년 전 말레이시아에서 직원 2명을 데리고 무역업을 시작해 '버스덕트'(Busduct)라는 전기부품 제조업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존경받는 CEO이자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긍지와 집념을 보여주고 있는 권 회장의 성공 비법과 인생관을 들어봤다.

◆정치에 뛰어들어 좌절한 젊은 기업인

1949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권병하 회장은 1975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국제그룹에 입사해 무역 수출입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다른 직원들보다 서너 배 많은 실적을 올려 '걸어다니는 오퍼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영업 수완이 남달랐다.

"1970년대 우리 경제는 태동기였지요. 마음만 먹으면 돈 한 푼 없이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월급쟁이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입사 5년 만에 회사를 나와 그는 오퍼상을 열었다. 사업은 예상대로 탄탄대로였다. 젊은 나이에 돈을 잘 버니 주변인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돈의 위력이었죠. 알아봐 주고 찾아 주는 사람이 많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심이 생겼습니다. 집안에 정치인이 있었는데 일을 도와준 것이 계기가 돼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하지만 정치판은 달랐다. 사업처럼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1981년 총선에서 서울 성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저기 보증을 섰던 당좌수표가 부도나면서 사업마저 정리해야 했다.

◆해외에서 새 출발

그는 해외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정치 야망을 꿈꿀 수 없는 남의 나라, 친구도 아는 이도 없는 낯선 나라에 가서 새로 시작하기로 맘을 먹었다.

그때 나이 34세. 일단 호주로 가서 청소용역업부터 하려 했다. 그런데 시드니 공항에서부터 입국을 거절당했다. 초청장을 보낸 지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이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말레이시아와의 인연은 국제그룹 근무 시절 며칠 왔다간 출장이 전부였다.

아침부터 자정까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쿠알라룸푸르 전 지역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던 중 용접봉 노즐이 그의 눈에 띄었다. 대부분 일본제품이었지만 국산제품도 말레이시아 시장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는 한국에서 노즐을 만드는 회사를 수소문해 생산을 의뢰했다. 첫 거래 금액은 1만3천500달러. 첫 거래를 성사시키고 10%인 1천350달러를 벌었다.

"그때 한국 업체가 사상 첫 수출이라며 감격한 나머지 비행기 특송으로 노즐을 보내온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 제 한 달 생활비가 50달러였으니 첫 아이템치고는 대박이었지요."

그는 이어 전기 배전반에 사용하는 마그네틱 컨덕터를 수입했다. 일본 후지전기 제품이 말레이시아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한국 회사로부터 제품을 공급받아 후지 제품보다 30% 싼 가격에 판매해 이윤을 남겼다. 자동펌프도 꽤 짭짤한 수익을 안겨줬다. 한국산 자동펌프 역시 일본 제품보다 30% 싸게 가격을 책정하니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버스덕트 한 가지로 세계 시장 석권

여러 가지 제품을 수입 판매하면서 직접 제조해서 판매하면 마진이 세 배 이상 뛴다는 것을 알았다. 1983년 그는 본격적인 제조업 창업을 시작했다. 제조 품목으로는 버스덕트를 선택했다. 전선을 대체할 수 있는 일종의 전력판인 버스덕트는 복잡한 전선 대신 구리나 알루미늄판을 따라 대용량의 전기를 안전하게 공급하는 첨단제품이다.

"지구 상에는 전기가 부족한 나라가 태반입니다. 아시아만 보더라도 한국, 일본 정도만 빼면 거의 모든 나라가 전기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요. 중국만 해도 1주일에 1번 이상 정전되지 않습니까. 전기 수요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합니다."

그는 미국 유럽에 있는 유명 버스덕트 생산 공장을 방문해 현장의 모습을 무작정 카메라에 담았다. 때로는 한국 엔지니어를 데려가서 제품 특징과 크기를 파악하도록 했다. 그는 엔지니어의 눈대중과 사진을 설계도 삼아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카피 제품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고품질의 헤닉권 브랜드 제품을 내놓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 납품으로 이름을 알린 헤닉권은 홍콩신공항과 영국 히드로공항 전기 설비를 맡으며 명성을 쌓았다. 이어 세계 모든 인텔 공장의 중전기 설비를 도맡아 업계를 놀라게 했다.

헤닉권 코퍼레이션은 버스덕트 단일 품목을 전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해 연간 1억6천만달러를 벌어들인다. 2008년에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주는 수출대상을 받았다. 세계시장 점유율은 30%에 이른다. 특히 개도국이 많은 아시아 시장 점유율은 60%나 된다. 세계 유명 전기 기업인 지멘스와 제너럴일렉트릭(GE)보다도 더 많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품질지상주의 그리고 사회 환원

헤닉권 코퍼레이션은 인터내셔널 기업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 80여 명만 해도 말레이시아, 중국, 대만,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헤닉권이라는 이름 아래 결속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CEO는 직원 중에서 선두 주자라는 것뿐입니다. 권위를 내세우면 사장이 아니라 대장이지요. 직원들이 자라온 환경, 정서, 언어, 문화, 고향, 국적이 다른데 전체를 끌고 갈 수 있는 공통분모는 소통하고 인간적으로 위해주는 것입니다."

권 회장은 매출 5%를 반드시 기술 개발에 투자한다. 인지도는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앞설지라도 품질만큼은 헤닉권이 앞선다는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기술 개발 덕분에 업계에서 헤닉권은 품질 보증 수표로 통한다. 유럽과 미국의 경쟁사들이 제품만 보내고 나면 사후관리에 소홀한 것에 비해 헤닉권은 사후관리까지 철저히 하고 있다.

그는 지금의 성공을 결코 혼자의 힘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빛나는 그의 경영철학이다.

그가 150만달러를 출연해 설립한 '헤닉권 장학재단'은 2003년부터 매년 말레이시아 경찰 자녀 350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또 한국학 보급을 위해 22년째 말레이국립대학의 한국학과 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그는 오래전에 가족과 직원에게 공언했다. 헤닉권은 내 사업체가 아니라 말레이시아 국민기업이라고.

"포드 사례를 보세요. 공장 앞에 창업자 작은 동상 하나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글'사진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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