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시조로 푼 한시] 讀書(독서) 1/ 서경덕

부귀를 내가 어찌 손을 댈 것인가

조선 최고의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황진이를 앞줄에 세운다. 어느 남자도 황진이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어느 시인도 황진이의 시 재주를 따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경덕은 황진이가 학문적 스승으로 사모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지만 서경덕은 독실한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다. 가난을 달게 받고, 결코 부귀와는 손잡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독서를 할 때에는 큰 뜻을 가슴에 품고

가난의 쓰라림도 달게 받아 감내하며

부귀를 멀리하면서 산과 물에 안겼으리.

讀書當日志經綸 歲暮還甘顔氏貧

독서당일지경륜 세모환감안씨빈

富貴有爭難下手 林泉無禁可安身

부귀유쟁난하수 임천무금가안신

【한자와 어구】

讀書: 독서/ 當日: 마땅히/ 志經綸: 큰 뜻을 품다/ 歲暮: 세모/ 還甘: 달게 받는다/ 顔氏貧: 안씨의 가난함 / 富貴: 부귀/ 有爭: 다툼을 두다/ 難下手: 어렵다고 손을 대다/ 林泉: 산과 물/ 無禁: 금하지 않다/ 可安身: 가히 몸을 편안하게 하고 싶다, 편안하게 할 수 있다.

'부귀를 내가 어찌 손을 댈 것인가'로 제목을 붙여본 율(律)의 전구인 칠언율시다. 작자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으로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에 이르러 "학문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 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 연구에 몰두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글을 읽을 때 큰 뜻을 품으니/ 가난의 쓰라림도 달게 받아들여진다/ 부귀를 내가 어찌 손을 댈 것인가/ 산과 물에 포근히 안기고 싶다'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책을 읽음'으로 번역된다. 소세양이 황진이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한 달간 계약결혼했던 데 반하여, 서경덕은 황진이가 그의 학문에 탄복하여 여인의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구애했지만 끝내 거절했던 점에서 다르다. 철학을 강조했던 화담은 그만큼 지조 높은 선비였다.

시인은 글을 읽을 때는 큰 뜻을 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난의 쓰라림을 어찌 마음에 두겠느냐는 자기 합리화의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뿐만 아니다. 부귀와는 결코 영합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면서 자연이라는 산과 물에 포근히 안기고 싶다는 자기 의지를 밝히는 데서 시적 의미를 둔다.

후구로 이어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나물 캐고 고기를 낚아서 그런대로 살면서/ 달을 읊고 바람을 쏘이면서 정신을 씻어 본다/ 내 학문이 이치를 깨달아 즐겁기만 하니/ 어찌 이 인생이 헛되겠는가'라고 했다. 학문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면서 결코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서경덕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다. 자(字)는 가구(可久), 호(號)는 복재(復齋)이지만 송도(松都'개성의 옛 이름) 화담(花潭) 부근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화담이라는 별호로 더 알려져 있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했다.

1489년 황해도 개성 화정리에서 종8품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서호번의 아들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어려서부터 탐구심이 많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치를 생각하느라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14세 때에는 '서경'(書經)을 공부하다가 태음력(太陰曆)의 수학적 계산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터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46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과 화곡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1567년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1575년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었다.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전해진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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