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VIP 환자

대부분 의사에게 자기만의 대단히 중요한 환자, 즉 흔히 말하는 'VIP 환자'가 몇 명씩 있게 마련이다. VIP 환자라면 대단한 재력가, 권력자, 저명한 인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부분 단골 환자임은 기본이고, 의사를 신뢰해서 무조건 그를 믿고 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여기는 환자가 바로 최고의 환자인 것이다.

이 환자는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들이 어디가 아프다는 말을 들거나 무슨 병으로 진단받았다는 소식만 들어도 그 사람을 끌고 그 의사에게 데려간다. 세상에서 둘도 없이 신뢰하는 그 의사에게서 얘기를 들어야만 안심하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토록 자신을 믿어주는 환자를 최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경남 지리산 자락에 사는 50대 후반의 보험 아줌마인 A씨는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VIP다. 대구에서 대학 다니는 딸을 데리고 와 진료를 받게 한 인연이 시작이었는데,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과 딸 둘의 진료는 물론 질병과 관련없는 소소한 것까지 의견을 구하고, 근처 누군가 몸이 안 좋다면 진료과목과 관계없이 내게 데려와 의견을 구하곤 했다.

봄에는 지리산에서 나는 산나물을, 여름이나 가을엔 과일, 말린 산나물, 채소를 직접 가져오거나 인편에 부치고는 했다. 그리고는 꼭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확인 전화까지 걸어왔다. 그래서 나물이 온 이튿날까지는 꼭 먹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서운해 하는지 미안해서 어쩌지 못할 노릇이었다. 오래전 마침 병원 한 직원이 그곳에서 결혼식을 하게 돼 직원들과 함께 지리산 자락으로 가게 됐다. 우연히 알게 된 A씨는 지리산 계곡 근처에 우리를 안내해 놓고는 염소까지 잡아 마치 잔치처럼 대접해 주었다.

10년 만에 맏사위가 왔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이 철철 넘치는 환대였다.

저명한 한 심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권력도 재물도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한다. 권력도 재물도 그 모두가 타인들에게서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의 수단이고 표현이라는 것이다.

제아무리 유명한 의사라도 자신을 신뢰하는 환자에게는 꼼짝 못한다. 그 믿음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게 인간의 심성이다. 한 의사에게 최고의 환자가 되고 대우를 받으려면 그 의사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내면 된다.

이런 것들이 의사와 환자 사이에만 존재하겠는가.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하에게, 정치판에서는 유권자가 정치인에게 끊임없이 진정성 있는 신뢰를 보낼 때 그 믿음에 부응하려는 긍정적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판에서도 과연 그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지는 왠지 자신이 없다.

박경동 효성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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