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3>파동 바위그늘

반굴·반노천 형대 거주지…구석기 토층 자갈돌 발견

'선사시대 별장'이라 부르는 바위그늘은 대부분 강가나 충적지에 위치한다. 파동 바위그늘 유적은 바위 위쪽이 2m 가량 돌출돼 있고 30도 정도 기울어져 성인 5, 6명이 비, 바람을 피하기에 적당한 구조다. 사진 제공 소설가 정만진

인류 최초 주거 양식은 노숙(露宿).

일반 들짐승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아주 미개했던 시절, 진화를 거듭하던 인류는 비바람을 피해 굴을 찾아들었고, 이후 자연동굴은 구석기인들의 주거형태 가운데 하나로 각광받게 되었다. 물론 주변에서 쉽게 굴을 찾을 수 있었던 소수의 인류만이 이런 수혜의 대상이 되었고, 지형상 동굴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상당수는 황야에서 나뭇가지나 풀을 이용하여 몸을 누일 수밖에 없었다.

바위그늘은 한자로는 암음(岩蔭), 고고학 용어로는 '록 쉘터'(Rock Shelter)라고도 한다. 입구의 규모에 비해 깊이가 깊고 비바람이 완전히 차단되는 동굴과 달리 반굴(半窟) 상태의 반노천(半露天) 형태. 바위그늘은 대체로 완전한 정착생활과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진입한 청동기시대 이전, 즉 수렵과 채집 의존도가 높았던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에 많이 활용된 유적이다. 따라서 바위그늘은 그 존재만으로 지역의 역사를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상향(上向)시킬 수 있는 지표유적으로서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2000년 대구시 파동의 신천변에서 바위그늘 유적이 발견됐다. 맨 아래 토층에서는 인공을 가한 흔적이 있는 자갈이 함께 출토됐다. 지역에 구석기시대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처음으로 알리는 순간이었다.

◆단양, 김천, 청도서 바위그늘 확인=국내서 바위그늘 유적지는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부산 금곡동 유적(1972년), 단양 상시리 유적(1984년), 김천 송죽리 유적(1989년), 청도 오진리 유적(1993년) 등이 대표적인데 이 가운데 김천 송죽리 유적과 청도 오진리 유적은 파동 유적과 입지와 규모가 유사하다.

국내 바위그늘 유적지의 압권은 단양 상시리 유적이라 할 수 있다. 1984년 연세대 박물관팀에 의해 발굴된 이 유적은 모두 3개소의 바위그늘이 조사되었는데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층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남한 최초로 구석기시대 인골이 출토되어 관심을 모았는데, 이는 직립(直立)원인 호모사피엔스 계열로 분류돼 우리 민족의 원류를 찾는 데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2천여 점이 넘는 동물 뼈들이 출토되었는데 하이에나, 말사슴, 아시아 두꺼비 등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절멸 동물들까지 망라되어 있어 홍적세 이후 한반도의 기상과 생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신천 중상류 하천변 산기슭에 위치=파동의 바위그늘 유적은 신천의 중상류 지역 법이산과 산성산 사이의 계곡 하천변에 위치해 있다. 법왕사를 지나 바로 장안사 입구 고가도로 교각 밑에 자리 잡고 있다.

파동 바위그늘 유적은 주변에 넓은 수성평야와 완만한 구릉이 발달해 있어 농사에 유리하고 인접한 신천은 용수와 수렵, 위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적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유적 외관을 살펴보자. 바위 위쪽은 2m가량 돌출돼 있고 여기서 지붕처럼 30도 정도 안쪽으로 기울어진 구조를 하고 있다.

당시 발굴을 직접 주도했던 신종환 대가야박물관 관장은 "파동 유적의 외형은 높이 6m, 가로 10m, 세로 5m에 이른다"며 "성인 5, 6명이 바람과 비를 피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충분한 규모"라고 말한다.

파동 바위그늘이 발견된 것은 2000년 12월. 국립대구박물관 발굴팀은 수성구 파동 용두산성 자락에서 15일간 발굴 작업을 벌였다. 앞서 1989년 김천 송죽리의 감천변 산기슭에서 송죽리 암음유적을 처음 발견하여 직접조사한 경험이 있는 신종환 관장은 1993년 운문댐 건설공사와 관련하여 청도 오진리에서 바위그늘 유적이 발견되자, 바위그늘 유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주변 비슷한 지형에서 지표조사를 하던 중 파동유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파동 바위그늘 주변엔 수많은 선사 유적이 자리 잡고 있다. 신천 양안(兩岸)과 범람원에는 상동, 대봉동, 이천동, 칠성동 지석묘 벨트가 형성돼 있고 대구에서 신석기시대 존재를 처음 알린 빗살무늬토기 출토지도 상동이다. 인접한 파동, 두산동에도 수십 기 고분군이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이 대구 선사시대와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지형임이 쉽게 입증된다.

◆유적 맨 밑에서 구석기 토층 발견=파동 바위그늘의 1.5m 토층에는 모두 4개의 문화층이 발견됐다. 최상층에서는 조선시대 백자편과 근대 토기 조각이, 2층에서는 삼국~통일시대에 이르는 토기 파편들이, 3층에서는 무문토기 및 유구석부 등이 출토되었는데 신석기~청동기시대의 문화층으로 추정된다.

발굴팀은 4층에서 단단한 점토층을 확인했는데 100만~1만 년에 전에 생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토양층이었다. 일반적으로 구석기시대 토층은 주로 갈색 또는 적색을 띠는 홍적세 점토층인데 이 조건에 상당 부분 부합됐다. 이 토층에서는 강(江) 자갈돌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 자갈은 날카롭게 깨진 면을 보이고 있었고 이 흔적은 자연 상태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어떤 인위적 충격이 가해진 상태에서 깨진 흔적으로 추정됐다.

구석기 토층에서 발견된 인공흔적의 돌은 지역 학계에 큰 이슈가 되었다. 어쨌든 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지역 학계에 구석기시대의 타제석기 문화가 존재했다는 가능성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물론 유물 해석에 한계가 있고 증거 능력도 아직은 미흡하다.

이후 2006년 월성동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면서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 존재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대구 역사를 2만 년이나 끌어올린 이 고고학적 성과 뒤에는 파동 바위그늘 유적이라는 결정적 힌트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선사 유적=선사시대 펜션, 구석기시대 별장으로 불리는 바위그늘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취재팀이 확인한 파동 주변 바위그늘 유사유적은 세 곳 정도 된다. 상동교 바로 밑자락에도 안쪽으로 깊이 팬 바위지대가 보이고 장안사 부근에서도 반(半)동굴이 하나 목격되었다. 이곳은 현재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이용되고 있다. 즉 제2, 제3의 선사 유적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 파동 고가도로, 신천우안로가 건설되면서 주변 경관이 훼손됐고 암음유적도 교각 사이에서 초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신천변 선사인들의 생활터는 흔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ㅡ "금호강∼동화천 일대, 바위그늘 유적 더 있을 것"

신종환 대가야박물관 관장 발굴 회고

2000년 파동 바위그늘 발굴조사를 직접 주도했던 신종환 관장(당시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연구사)으로부터 당시 발굴 회고담을 들어봤다.

-파동 바위그늘 발굴 계기는.

▶1989년 김천 송죽리 암음유적을 처음 발견하여 조사하였고, 1993년 청도 오진리 암음유적이 조사되자 지역에서도 암음유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또 상동, 동서변동에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되면서 지역의 선사유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대구분지 주변의 암음유적 확인을 위한 지표조사를 하던 중 파동 암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굴과정서 에피소드는.

▶유적지 발굴을 위한 문화재청 발굴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땅주인의 동의가 필요한데 지주가 반대해서 무척 애를 먹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적지로 지정되면 재산권 행사나 토지활용에 제약이 따를까 봐 망설였던 것 같다. 사무실에 몇 번을 찾아가 사정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구석기 시대 토층이 확인됐나.

▶맨 밑바닥에서 딱딱한 점토층이 발견됐다. 구석기시대 유적이 형성되는 홍적세 고토양 층으로 판단되었다. 거북등처럼 균열이 간 얼음쐐기(아이스웨지:ice wedge)가 발달한 것을 확인하였다.

-고토양 층에서 자갈이 발견됐다는데….

▶보통 하천변 퇴적토에는 물에 의해 자연적으로 운반'퇴적된 자갈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파동 경우에는 정황상 자연 퇴적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또 자갈돌 대부분 반파(半破), 또는 조각들이 많아 인공에 의한 타격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아쉬운 점은.

▶파동, 금호강변, 동화천 상류 지역은 선사인들의 활동무대로 바위그늘 유적 존재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지금 주변은 대규모 아파트건설, 토목공사로 유적지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지자체나 관련 학계가 나서서 본격적으로 지표조사, 발굴조사를 통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밝혀내고 보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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