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부도덕·허세 가득한 美 자본주의의 '민낯'

마틴 스콜세지, 그가 여전히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데, 건재할 정도가 아니라 싱싱한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걸 증명하는 거장의 포효를 본다. 호쾌한 기백마저 느껴진다.

1942년생. 1976년에 '택시 드라이버'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분노의 주먹'(1980)과 '코미디의 왕'(1983)으로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기수로 확고히 자리한다. 그는 뉴욕의 리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범죄드라마를 통해 미국 사회의 부도덕한 측면을 비판해왔으며, 뮤지컬이나 판타지, 멜로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영화 형식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홍콩 영화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로 2006년에야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며, 아직도 왕성한 영화 연출은 물론이고 초창기의 활력적인 실험정신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스콜세지의 신작이 개봉했으니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갱스 오브 뉴욕'(2002) 이후로 로버트 드니로의 뒤를 이어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가 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증권가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한 남자를 그린다. 9·11로 일대 폭격을 맞고서 휘청거린 그곳, 뉴욕의 월스트리트, 그리고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서 시작된 경제위기.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었다고 부러워하던 꿈의 나라 미국이 공격당할 수도, 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영화는 월스트리트에서 흥망성쇠를 경험한 인물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조망하고 자본주의의 추악한 민낯을 응시한다.

조던 벨포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맨몸으로 자본주의 정글인 증권가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다 하루아침에 파산한 실존 인물이다. 20대의 조단은 월가의 한 증권회사에 취직하여 주식브로커가 된다. 선배 브로커는 먹이를 보고 낚아채는 야수 같은 생동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마약과 마스터베이션은 필수라고 가르친다. 일찍이 돈의 매력에 취한 이 청년은 회사가 파산하자 마약이나 팔던 어린 시절 친구들을 모아 스크랜턴 오크몬트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화려한 언변으로 무장한 조던 일당은 고객이야 파산하든 말든 돈만 내 주머니로 들어오면 상관없다는 몰지각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모은다. 짧은 기간 내에 성공적인 투자회사로 키워내며 조던은 '포천'지 표지인물이 되고, 이때 얻은 별명이 '월가의 늑대'다. 그는 월가라는 정글을 종횡무진 활약하는 거칠 것 없는 역동적인 젊은 늑대로 명성을 날린다.

영화는 월가에서 성공하고 좌절한 한 우스꽝스러운 남자의 좌절담이지만, 돈에 탐욕스럽게 집착하되 공명심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성공이라고 추앙받는 미국식 성공 개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스콜세지의 범죄영화들처럼 이번에도 카메라를 통해 미국의 역사를 삐딱하게 거꾸로 다시 쓴다. 부의 제왕이 된 남자는 마약과 여자에 취해 살고, 자동차, 헬기, 대저택, 요트를 장난감 사듯이 모은다. 카메라는 조던의 행적을 유려하게 따라가 화려하게 치장된 뉴욕 상류층의 일상을 훑으며, 부도덕과 허세로 가득한 월가의 작동원리를 관찰한다.

영화는 인물에 깊이 동화하지 않고 곁에서 관찰하면서 낄낄거리게 만든다. 조던은 자본주의 정글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생존자로서 연민을 일으키고 공감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의 흐리멍덩한 윤리의식, 요설로 가득한 말의 향연과 거칠 것 없는 행동거지가 초래하는 비극적인 해프닝들은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마음껏 조롱하게 만든다. 영화는 19금의 울타리 안에서 거침없이 내달린다. 3시간의 긴 러닝타임에 말이 무척이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루할 틈이 별로 없다.

주인공의 예고된 몰락을 지켜보는 것에 그 어떤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약의 남용으로 뇌에 급성 마비가 온 조던이 바닥을 기는 것은 나락으로 곤두박질한 상류층 말종 인간의 처지를 풍자한다. 최고로 비극적인 순간조차 멀찍이서 지켜보니 우습기만 하다. 관객은 술, 마약, 섹스의 끝없는 향연을 마음껏 즐기고 구경하면서 자본주의 성찬의 천박함을 비웃으면 된다. 로미오 시절의 해맑은 미소를 아직도 간직한 중년의 디캐프리오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노예상인, '위대한 개츠비'의 신흥 부호에 이어 이 영화의 증권 브로커까지 각 시대의 최고 부자 역할을 연기한다. 사회의 속살을 구현하는 핵심적 역할로 그는 일관성 있는 캐릭터를 쌓아올리고 있다.

돈의 맛은 천박했으나 황홀했다. 조던의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FBI 요원이 퇴근길에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의 피로에 찌든 모습이 오히려 낯설다. 아메리칸 드림은 신앙이고, 증권사 사장 조던은 원시사회의 부족장처럼 직원들로부터 호들갑스럽게 추앙받았다. 종교가 되어버린 돈 앞에서 부끄러움이나 염치를 모르는 인간들은 문명의 완벽한 실종을 구현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충직한 후예들이다. 죽을 때까지 호사스럽게 써도 다 쓰지 못할 정도이지만 돈은 계속해서 벌어야 하고, 죽음의 순간에도 코카인을 흡입해야 하며, 완벽한 아내가 있어도 창녀는 따로 들여야 하는 비상식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탐욕이다. 조던은 늘 흥분해서 먹잇감을 찾아다녀야 하는 아드레날린의 화신이다. 여전히 이와 같은 인간 부류를 추종하는 대중들이 있는 한 비이성적인 자본주의 정글은 계속될 것이다. 범죄 스릴러, 코미디, 세속적 드라마가 뒤범벅된 가운데 돈의 요란스러운 성찬을 보는 맛은 쌉싸래하다.

영화 바깥의 실제 조던 벨포트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영화 크레디트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책 수입과 영화 개런티로 그는 아직도 빚을 갚고 있다.

영화평론가 yedam98@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