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사라지는 소중한 것들

해마다 이맘때면 스멀스멀 등줄기에서 기어 나오는 무엇이 느껴진다. 바쁜 겨울철 동안 미뤄왔던 책읽기가 그것이다. 물론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욕망이라고 얘기해도 어쩔 수 없다. 새싹이 파릇하게 돋아나는 예감이 감지되면 더욱 심해진다. 머리의 묵직한 둔중함이 짜증스러워지는 시즌이기도 하다.

서점에 들러 이런저런 책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내 눈빛은 광기 어린 발광 채를 뿜어낸다. 긴 겨울 동안 수많은 작가가 책상 앞 컴퓨터에 앉아 시름했다는 증거를 발견하고 경건한 호기심을 발동한다. 새책에서 나는 특유의 잉크냄새와 종이냄새가 향기롭다. 봄철 꽃들이 피워내는 향과 다르지만 어느새 필자의 후각은 익숙한 고향집 거름냄새와 같은 정겨움을 만끽한다.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평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대의 천박한 물질문명을 온몸으로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이 반성 없는 기반 위에서 절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경고였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최근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를 연상케 하는 내용도 보였다.

몇 권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서점을 나선다. 싸늘한 늦겨울의 찬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여기저기 네온이 거리를 밝히기 시작했다. 불현듯 오후 6시쯤이면 깜깜하던 시골길이 생각났다. 밤에 친구를 보러 나서는 필자에게 어른들은 여우 얘기와 호랑이 얘기를 곁들이면서 나서던 발길을 주저앉히기 일쑤였다. 밤만 되면 으레 이부자리를 펴던 시절이었다. 어둠은 잠자기와 동격이었다. 그러나 전기라는 문명의 이기는 이 같은 시골의 감성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 일상이 다반사다. 자연의 순리에 역행한 일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수많은 전문가가 판을 짠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긴 해도 늘 마뜩잖은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유년의 시절 동네 이웃집 아저씨는 농사전문가이면서 축산전문가이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우리들의 썰매도 만들어주는 전문가였으며 이웃집 지붕을 갈고 나무를 다듬는 목수 같은 역할도 서슴없이 해내곤 했다. 모든 일에 전문가였다. 동네 모든 어른들이 마을의 모든 문제에 전문가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요즘 이 같은 전문가들을 만나기 힘들다. 생활의 지혜를 깨우쳐봐야 별볼일없는 세상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책은 많은 전문가를 만나게 하는 장이다. 이 코너 저 코너를 넘나들면서 기상천외한 전문가들을 만날 수 있다. 이야기 전문가, 요리전문가, 농사전문가 등등. 모든 세상의 달인들을 서점이라는 만남의 장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서점도 이젠 점점 밀려나는 운명에 놓여졌다. 모든 세상의 사라진 것들과 운명을 함께할 준비를 서두르는 듯하다. 시골의 사라진 많은 것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우병철 365정형외과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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