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노을 해변

하루의 임종 같은 석양, 그를 조문하며 막걸리 한 잔을

구름과 노을은 풍류객의 노리개다. 양나라 도홍경이란 선비는 벼슬을 마다하고 술이 좋아 산속에 숨어 지냈다. 임금이 불러 "산속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 위에 흰 구름 많지요. 혼자 즐길 수는 있어도 임금님께 갖다 드릴 수는 없지요"라고 말했다. 다음 임금도 벼슬을 주려 했지만 구름과 놀면서 나아가지 않았다. 술독과 함께 살다 죽었다.

청나라 장조가 쓴 '유몽영'에 이런 구절이 있다. "풍류는 혼자 누리되 다만 꽃과 새의 동참은 허용한다. 거기에다 안개와 노을이 찾아와 공양을 한다면 그건 받을 만하다. 세상일 다 잊을 수 있지만 여태 담담할 수 없는 건 좋은 술 석 잔이다." 풍류객들은 이렇게 구름과 노을을 벗하면서 항상 술단지를 끼고 살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태양이/ 키 작은 소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 광(光)이다' 큰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중략) 술잔 몇 순배 돈 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키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 있었다/ 바닷물도 눈자위가 볼그족족했다"(허형만의 시 '석양' 중에서)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나는 노을 지는 해변에 앉아 맘 맞는 친구와 이런저런 얘길 나누며 막걸리 한 잔 마시는 걸 소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요행히 해넘이 풍경이 멋진 곳을 찾아가도 술 상 차릴 여유가 없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번번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다.

수첩에는 서해 일몰 명소들이 숱하게 적혀 있지만 붉은 줄이 그어진 곳은 몇 곳 없다. 언젠가는 찾아봐야 할 곳이지만 생애 중에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나열하면 백령도 두무진, 강화 석모도, 화성 궁평리, 당진 왜목마을, 태안 꽃지 해변, 서산 간월암, 서천 마량리, 부안 채석강, 영광 백수해안, 신안 도리포, 무안 오강섬, 함평 돌머리, 신안 홍도, 하의도 큰바위 얼굴 해변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얼추 다녀오긴 했지만 느긋하게 앉아 석양주 한 잔 마신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좋은 환경을 찾아나서는 것을 경제학자들은 '발로 하는 투표'(Vote with feet)라고 한다. 그러면 시와 술을 즐기는 풍류객들이 멋진 산천을 찾아 나서는 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풍경은 눈으로 즐기는 것이니 '눈으로 하는 투표'(Vote with eyes)라면 틀린 말일까.

이 글의 서두에 말했던 도홍경과 유몽영에 나오는 선비처럼 벼슬도 마다하고 안개와 노을을 벗하고 살면 배짱과 내공은 저절로 쌓일 것 같다. 나의 경우 벼슬은 원래 없었던 것이니 임금이 부를 까닭이 없다. 그러니 꽃과 새들이 노니는 곳을 찾아다니기만 하면 구름과 노을은 덤으로 따라올 터이니 세상 잡사와 근심에게 공양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일출과 일몰은 태양이 주인공인 하루에 일어나는 연극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해돋이는 감동적이지만 해넘이는 너무 황홀하여 신비적이다. 아마 종교가 생성된 시간대는 서쪽 하늘을 주황으로 물들이는 저녁 무렵이 아닌가 싶다.

해가 지면 어디선가 조종 소리가 들린다. 태양 앞에서 빛을 발하던 모든 물상들은 해가 지는 순간에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 시간만큼은 기도처럼 엄숙하다. 이 세상의 모든 제사장과 사제 그리고 성직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의식을 주관하는 것도 일몰의 신비와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침 하늘의 붉음은 대낮을 불러오지만 저녁 하늘의 붉음은 어둠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어둠의 장막을 걷는 일출은 새날 새 아침을 여는 종소리 같고 그것은 희망과 용기로 가득 차 있다. 반면에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하늘의 구름과 바다의 물결까지 온통 붉게 색칠하는 그 장려한 낙조는 관조(觀照)의 풍경을 연출한다. 아침 해가 수평선 위로 뛰어오를 땐 불끈하고 반 박자 빠르게 도약하지만 서(西)로 지는 저녁 해는 목숨이 임종하듯 그렇게 자지러진다.

노을이 아름다운 석양 풍경에 갇혀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겸허해진다. 노을은 맨 꼬랑지에 달려 있는 하루의 부록이다. 눈이 부신 태양도 노을이 괘불걸이에 매달린 탱화처럼 서쪽 하늘에 걸리면 바로 열반에 들어야 한다. 그 황홀한 노을의 붉음도 결국 어둠의 색깔인 검정으로 환원하고 만다. 이 얼마나 장엄한 광경인가. 버킷 리스트(Bucket list)에 적어 둔 노을 해변으로 자주 찾아가야겠다. 하루의 임종을 조문하면서 막걸리 한 잔과 더불어 슬픔에 젖어 봐야겠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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