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더딘 사랑-이정록 (1964~ )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의자』, 2006.

돌부처가 눈을 감았다 뜨면 돌은 부서져서 모래가 될 것이다. 그런데 돌부처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시간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할까? 달이 윙크를 한 번 하는 시간은 1개월이 걸린다. 눈을 깜빡거려서 윙크를 보내는 일은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다. 현대인들도 사랑을 한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기만 하면 온통 사랑이야기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하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사랑은 그 만남과 헤어짐이 무상하다. 만났다 헤어지는 일이 마치 밥을 먹는 것처럼, 혹은 나들이 다녀오는 것처럼 빠르고도 쉽게 이루어진다. 시인은 달이 윙크하는 것의 느림과 사람들의 사랑의 빠름을 대비하고 있다. 그 대비가 능청스러워 읽는 사람들로 하여 빙그레 미소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이정록 시인은 실제 유머가 풍부하여 늘 좌중을 즐겁게 하는 시인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가장 긴 시간을 겁(劫)이라 하고 가장 짧은 시간을 찰나(刹那)라고 한다. 시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면 일각도 여삼추가 되고 영원처럼 긴 시간도 순간이 된다. 현대인들은 물리적 시간에 길들여져서 늘 시간에 쫓기며 산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산다는 명예롭지 못한 말을 듣기도 한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뒤 '그대와의 짧았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달의 윙크에 비하면 그의 사랑은 결코 짧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의 길고 짧음은 시간을 인식하는 주체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길다고도 할 수 있고 짧다고도 말할 수 있다. 늘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은 느림의 미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권서각 시인 kweon5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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