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더 타임스'(The Times)에 '20세기 들어 인간의 수명은 35년 정도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 30년은 상수도 보급 덕'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생명과 정화(淨化)의 상징인 물이 인류가 삶을 영위하는데 제1의 조건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갈증 해소, 조리, 위생 같은 기본적인 생활은 물론 농업, 목축, 산업용수 등 생산 활동에서도 물은 필수요소다. 안정적인 물을 확보하려고 인류는 고대부터 각종 치수(治水) 사업을 벌여왔다. 이 중 우물은 인류가 가장 먼저 주목한 수리(水利)사업 이었다.
1997년 북구 동천동 취락유적에서 청동기시대 우물 유적이 발견됐다. 발굴된 유적은 모두 4곳. 우리나라 고고학 유적을 통틀어 최초의 우물 발굴이었다.
◆우물은 공동체 사교와 교류의 공간=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본 인류 최초 우물 유적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허무두(河姆渡) 유적지. BC 4천 년경에 만들어진 이 우물은 인류가 식수와 용수를 구분해서 썼음을 증명하는 최초의 자료로 의미가 있다. BC 3천 년을 전후해서는 중동, 지중해 유역에서도 우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식수, 생활용수 확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우물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마을의 문화와 사교, 교류의 공간으로서의 기능이다. 우물은 분명히 음용(飮用)과 세탁과 조리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공간이었다.
'인가가 많은 번화가'를 뜻하는 시정(市井)에 우물(井)이 들어간 것도 같은 이치다. 공동 우물을 이용하려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우물은 자연스럽게 마을의 중심, 소통의 공간이 되었다.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우물 기록들=우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건국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탄생 설화는 양산 기슭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부인 알영도 알영정(閼英井) 용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고분 안악3호분 동측실(東側室)엔 우물 그림과 함께 벽에'井'(정)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어 당시에 우물이 일반화됐음을 짐작게 한다.
백제 역사서에도 우물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백제 사서에 탕정군(湯井郡), 정촌현(井村縣), 천정군(泉井郡) 등 지명이 많이 나타나는 데 이들 지역이 모두 우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북구 동천동에서 최초 우물 발굴=동천동 우물은 취락유적 발굴 과정에서 발견됐고 유적지 한복판에 있었다. 출토 우물은 모두 4곳.
우물 1호의 전체 규모는 110×79㎝로 축조 상태는 원형이다. 우물 벽은 2단으로 좁아지는 구조. 내부는 10, 20㎝의 자갈돌로 벽을 시공했다. 깊이는 61㎝며 바닥은 물이 스며 나오는 모래 자갈돌까지 파서 집수(集水)에 쉽도록 했다. 바닥에는 출토 유물은 없고 상부에 무문토기 편이 발견되었다.
우물 2호의 상부 지름은 90㎝, 바닥 지름은 20㎝로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다. 우물 윗부분 전체 모형은 원형이고 벽은 2단으로 좁아지는 구조. 윗부분에 주먹만 한 자연석을 쌓았고 하단에 모래 자갈층을 그대로 이용했다. 전체 깊이는 63㎝로 바닥에는 아무 유물도 관찰되지 않았다.
우물 3호는 지름 70㎝의 원형 구조로 우물 2호와 110㎝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발견됐다. 우물 윗부분은 자갈돌로 둥글게 돌려가며 축조되었다. 깊이는 가장 낮은 50㎝로 바닥은 역시 모래 자갈층과 연결되어 있다.
우물 4호는 3호 우물에서 북동쪽으로 1m 거리에 자리 잡고 있고 지름은 80㎝. 자갈돌로 둥글게 돌아가며 쌓았고 안으로 쓸려 내려간 느낌을 준다. 내부 지름은 20㎝며 깊이는 61㎝다. 바닥은 정수에 유리한 모래 자갈층이고 내부에서 무문토기 편이 발견되었다.
◆동천동 우물의 고고학적 의의=동천동 우물의 고고학적 의미는 고대 치수(治水)에 대한 개념이 구체화 된 최초 유물이라는 점이다. 즉 이전의 신석기시대에 자연 상태의 물을 가공 없이 그대로 이용했다면 청동기시대엔 물을 마을 또는 주거지 근처로 끌어들여 편리성과 접근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두 번째는 원시 신앙의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의미다. 박혁거세의 '나정 설화'처럼 고대 우물은 성지(聖地)로서의 의미가 있다. 우물은 예로부터 정화, 생명의 근원, 제의(祭儀)의 장소로 역할을 했다. 같은 청동기시대 유적인 논산 연무읍 마전리 우물에서도 제사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백제 유적인 풍납토성 우물에서는 우물 바닥에 200점이 넘는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세 번째는 고대인들의 위생관념이 진화됐음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즉 주변에 팔거천이라는 큰 하천이 있음에도 따로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은 생활용수와 식수를 구분하고 하천수와 정화수를 구별했다는 증거가 된다.
마지막은 석조(石造) 우물이라는 재료적 특성이다. 다른 지역의 예처럼 보통은 시설의 용이성 때문에 먼저 목재를 주목하기가 쉽다. 앞서 언급한 중국 허무두 유적이나 논산 마전리 유적이 목조 우물인 점이 그렇다. 공사 재료로 돌을 사용했다는 것은 내구성을 위한 판단일 수도 있고 종교적 제의와 관련된 선택일 수도 있어 문화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우물의 축조는 문명의 출발점=우물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용수 공급 수단으로 고대 취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써 의미가 있다. 인류는 우물이 확보되면서 물을 찾아 이동하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오염수로 말미암은 질병이나 전염병의 위험도 덜 수 있었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는데도 우물은 크게 이바지를 했다. 안정된 식수를 기반으로 고대인들은 취락 규모를 확대하고 문화를 진보시킬 수 있었다.
동천동 우물은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그만 웅덩이나 옹달샘에 불과하다. 힘센 장정 한둘이면 반나절에도 축조할 수 있는 규모다. 그러나 이 작은 옹달샘이야말로 자연 상태의 물을 동네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소중한 노력이었고 이 시도야말로 문명을 여는 작은 발걸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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