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이웃나라 일본에는 '이지메'라는 친구를 따돌림시키고 괴롭히는 악덕 문화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당시 이지메를 당하던 재일한인이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 스스로 몸을 던진 사건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충격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은 단막극으로 제작되어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아역배우가 열연을 펼쳤고, 나는 드라마가 끝나고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음날 나는 눈이 퉁퉁 부어 학교에 갔다. 학급의 대부분 아이들이 그 드라마를 봤고, 다들 눈이 퉁퉁 부어서 왔다. 이웃나라는 참 이상한 나라임을 한참 성토하였고, 우리가 빨리 힘을 길러 재일한인이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자고 호기로운 결의를 다졌다. 20년이 지난 후, '이지메'라는 끔찍한 단어는 '왕따'라는 일상적인 단어가 되어 우리 곁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우아한 거짓말'은 어느 날 갑자기 생을 마감한 여린 아이의 죽음의 원인을 조용히 추적하는 우아하고도 슬픈 영화다.
엄마는 두부를 파는 판촉사원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감사합니다"를 복창한다. 그리고 활짝 웃는 연습을 한다.
어느 날 열네 살 막내딸 천지가 죽었다. 빙그레 웃고, 조용히 뜨개질하던 착한 아이의 죽음의 원인을 엄마는 알지 못한다. 엄마에게 걸리는 일이 하나 있다. 딸은 죽기 전에 난생처음으로 MP3를 사달라고 졸랐다.
고등학생인 첫째 딸 만지는 동생과 달리 무뚝뚝하고 쿨하다. 동생과 대화를 나눈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유서도 없이 동생은 사라졌지만, 언니는 언니의 인생을 또 살아간다.
참을성 많고 생활력 강한 두 모녀는, 죽은 원혼 때문에 집에 재수가 없다며 나가길 종용하는 집주인에게 걸쭉한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떠난다. 두 사람은 가슴 한쪽이 뻥 뚫렸지만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남편에 이어 딸을 보낸 박복한 엄마에게는 치근덕거리는 놈까지 있어 삶이 더욱 고단하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난데없이 눈물이 흘러도 쓱쓱 닦아내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우연히 만지는 천지의 친구 화연이를 통해 천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다. 천지는 유언을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신호를 보냈고, 또 쪽지들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남긴다. 만지는 천지의 쪽지를 하나하나 발견하면서 죽음의 실체에 다가간다.
영화에서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 천지는 잘 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엄마는 강하다고 거짓말을 한다. 만지는 초연한 척 거짓말을 하고, 화연은 친한 척 거짓말을 하고, 반 아이들은 자신은 상관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천지가 최대한 크고 넓은 네모판을 뜨듯이, 거짓말은 거대한 손뜨개 네모판이 되었다가 감당할 수 없을 때 어느 날 스르르 한데 풀려버린다. 모두가 아이의 죽음에 관련이 있고, 모두가 침묵한다. 그리고 잊혀갈 뿐이다.
고객님 앞에 서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감사합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터져 나오듯이, 딸에게 '무엇이 문제니?' '잘 지내줘서 고맙다'라고 해보았더라면, 친구가 없을 땐 누구랑 놀아야 하느냐고 물어오는 동생에게 넌 혼자가 아니라고 알려주었더라면, 친구가 갑자기 등 돌린 사연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더라면, 그러면 그 아이는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각자 너무 바쁘고 너무 팍팍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서러운 카톡과 두려운 짜장면, 그리고 슬픈 뜨개질에 담긴 비밀이 하나씩 풀려간다. 영화는 거대한 추적극이 아니라, 담담하게 일상의 사물들을 응시하며 서로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우아한 가족 드라마다.
김희애의 삶을 품은 연기는 동감을 불러 일으키고, 천지 역 김향기의 맑은 얼굴은 가슴을 치게 한다. 만지 역의 고아성, 화연 역의 김유정 외에 감초 연기를 하는 성동일과 유아인의 연기 앙상블도 보는 재미를 준다. '완득이'의 원작자와 영화감독인 김려령과 이한이 다시 뭉쳐 만든 작품이다.
가난한 동네의 초라한 인간 군상을 지켜보는 일이 이상스럽게도 마음을 정화시킨다. 영화는 터져 나오는 슬픔의 순간보다는, 잔잔하게 배어 있는 깊은 슬픔을 꾹꾹 눌러담으며 삶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빨간 실처럼 연결된 서로의 관계망 속에서 타인의 고통은 바로 나의 고통이 된다는 것을 영화는 조용하고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작은 위안을 준다. 아이들아, 더 이상 죽지 마라!
정민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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