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중략)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거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 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박남준의 시 '봄날은 갔네' 중에서)
단풍을 잃고 삭풍에 떨던 앙상 가지들이 꽃물을 퍼올리고 있다. 계곡의 얼음장 밑에 물방울 소리가 들릴 때부터 연두색 기운을 띠던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철 늦은 눈보라에 상고대를 피우던 꽃샘추위쯤이야 안중에도 없다. 늦게 피는 가지 위의 눈꽃은, 꽃눈을 재촉하는 가수 뒤에서 노래하는 허밍코러스들의 하모니에 불과하다.
새벽잠이 없는 매화는 눈 속에서 꽃이 피고 산수유는 노랑 물감통을 들고 나와 박자를 맞추느라 부산을 떤다. 원래 이 동네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리면 저 동네에서도 징과 북이 가만있질 못하고 맞장구를 친다. 산천도 마찬가지다. 개나리가 병아리 혓바닥 같은 노란 꽃잎을 쏘옥 밀어내면 진달래가 어깨춤을 추며 튀어나온다. 바야흐로 난장판이다. 늦잠에서 깨어난 벚꽃은 개나리가 꽃잎을 거둘 무렵 '날 좀 보소' 하고 꽃대궐을 만들어 거리에 서서 열병식을 거행한다.
나는 아무래도 봄을 타는 남자인 모양이다. 봄소식이 들리기만 하면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한다. 금오도 비렁길과 나로도 봉래산을 종주하면서 모가지 댕강 잘린 동백꽃을 원 없이 보았어도 또 매화향이 맡고 싶어 안달이 난다. 일찍 피기로 소문난 통도사 영각 앞 홍매를 보러 갈거나, 화엄사 각황전과 원통전 사이에 서 있는 흑매를 보러 갈거나 하고 벼르다가 봄을 놓치고 만다.
최근 몇 년 동안은 4월 10일께가 절정인, 비교적 늦게 피는 승주 선암사 법당 뒤의 오륙백 년 묵은 홍매를 만나러 다녔었다. 홍매 향을 맡고 나서야 인근 벌교의 낙지와 꼬막의 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함께 갈 팀과 일정을 맞출 수가 없어 이렇게 앉아서 용만 쓰다가 빼앗긴 들의 봄처럼 봄을 잃어버릴 것 같다. 나의 탐매행은 총질이 서툴러 날아가는 꿩을 겨누기만 하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헛총 포수가 될 때 가장 서글프다.
오늘은 남한강변에 서서 나보다 먼저 달려온 봄을 만나고 있다. 강 너머 흐릿한 산줄기는 연한 푸른색을 띠고 있고 강물에 빠져 있는 산 그림자의 색깔도 라이트 블루다. 산과 강이 언제 미술공부를 했는지 데칼코마니 기법을 그대로 옮겨 산 밑의 강이나 강 위의 산이나 그렇게 닮았을 수가 없다. 갑자기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다. 향 좋은 블루 마운틴을 마시면서 마할리아 잭슨이 부른 '깊은 강'(Deep river)이란 흑인 영가를 듣고 싶다.
나는 간혹 이렇게 사치스럽다. 터벅터벅 강변을 따라 걷는다. 이곳 역시 계절이 순서를 잃어버렸는지 꽃들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도 없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피어 있다. 꽃이 피고 지는 건 다만 꽃의 소임일 뿐인데 사람들이 '일찍 피네 늦게 폈네' 하며 타박하는 걸 꽃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나는 강만 보면 물고기가 잡고 싶어진다. 그런데 강이 이렇게 깊고 넓으면 고기잡이는 틀린 일이다. 물고기들은 소(沼)와 여울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 강심이 얕은 곳에서 주로 논다. 깊은 강이라고 고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상에서 제외할 뿐이다.
옛날 다산 선생도 고향인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근처 초천을 그리워하며 남긴 글이 있다. 다산은 1799년 자신이 속해 있던 신서파의 후원자였던 번암 채제공 대감이 세상을 뜨자 반대파에 밀리게 된다. 설 자리를 잃은 다산은 솔가하여 고향인 이곳 소내 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작은 돈으로 배 하나를 사서 그물과 낚싯대 한두 개를 갖춰놓고, 또 술과 잔 그리고 소반을 준비하고 싶다. 늙은 아내와 어린 아이 그리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데리고 수종산과 소수(水) 사이를 왕래하면서 오늘은 그물로 고기를 잡고 내일은 어느 곳에서 낚시질을 하며 그 다음날은 여울에서 고기를 잡을 것이다. 바람을 맞으면 물 위에서 자고 때로는 짤막한 시가를 지어 스스로 팔자가 사나워 불우하게 된 정회를 읊을까 한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다."(다산의 시 '소내강 안개 속에서 낚시질하며' 중에서)
저녁 해거름, 남한강변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과 강뿐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 행화촌(杏花村) 입구에 주막이라도 있으면 물고기조림이나 시켜놓고 다산 선생을 추억해 볼 텐데. 세상 일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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