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에는 3가지 요체가 있다고들 한다. 운(運)'둔(鈍)'근(根)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능력 하나만으로 성공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운을 잘 타고나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하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을 놓치지 않고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하고, 운이 트일 때까지 버티어나가는 끈기라고 할까, 굳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근과 둔이 따르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좋은 운이라도 놓치고 말기가 일쑤다." (1972년 호암의 발언 중에서)
한일강제병탄의 해(1910년)에 태어난 호암은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10'26사태 등 글자 그대로 '격변의 세월' 속에서 글로벌 기업 삼성을 만들어냈다.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항상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지도 모른다." 기업을 창조해내고 그 기업을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호암은 기업인의 기를 꺾어버리는 세태를 이렇게 비판하며 때로는 격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참을 줄 아는 기업인이었다. 호암은 그의 표현대로 '창자를 도려내는 아픔'이 있었지만 인내를 통해 더 큰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당신은 부정축재자요!"
"그동안 탈세로 모은 재산이 얼마요?" (부장검사)
"아직 자세히 계산해보지를 못했습니다." (호암)
"왜 탈세를 했어요?" (부장검사)
"6'25전쟁 당시 세수 증대를 위한 세제가 아직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법인세'사업소득세'물품세'영업세'부가제세 등까지 더하면 세율이 기업 수익의 120%에 이릅니다. 불합리만 세제는 덮어두고 기업만 부정축재자로 몰아 죄를 묻는 것은 사리에 어긋납니다." (호암)
4'19혁명 직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난생처음으로 검찰에 출두한 호암은 시종일관 검사에게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무리한 수사'임이 간파된 때문인지 호암에 대한 탈세 수사는 벌금형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추징금 처분으로 마감됐다. 부정축재 기업으로 몰린 삼성 관계사 6곳은 50여억환의 추징금을 물어야 했다.
시련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4'19 이후 국내 혼란을 피해 도쿄에 머물던 호암에게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달 29일 경제인 10여 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부정축재 1호는 도쿄에 있는데 조무래기들만 체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옥중에서 불평이 터져 나온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호암은 귀국했고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났다. 호암은 박 부의장에게 앞서 검찰 수사에서 얘기했던 세제의 불합리성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그리고 이미 구속된 기업인들의 전원 석방을 건의했다.
박 부의장은 호암의 얘기를 들어줬고 기업인들은 바로 석방됐다. 그러나 박 부의장은 "국민이 납득할만한 조치는 취해야 한다"며 삼성을 비롯해 기업인들에게 거액의 추징 벌과금을 내게 했다. 삼성에는 103억환이 부과됐다. 전체 기업들에 내려진 벌과금의 4분의 1이었다.
호암은 사실 몹시 분통이 터졌다. 호암은 4'19와 5'16을 거치면서 기업인으로서 겪었던 좌절과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생애에서 단 한 번 정치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이 있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다." 그는 2번씩이나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참담함 속에서 정치에 나설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는 또 한 번 참았다.
◆"내 평생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호암은 회고록을 통해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문장을 썼다. 1966년 가을에 터진 '한국비료 사건'이다.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호암은 비료 공장 설립에 대한 꿈을 오랫동안 꿔왔다. 자유당 정부 말기부터 비료사업을 눈여겨보던 호암은 박정희정부가 들어선 뒤 당시 정부 지원과 일본의 차관을 얻어 세계 최대인 연 33만t 생산규모의 '한국비료' 공장 건설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요소비료 공정에 쓰이면서 사카린의 원료가 되는 OTSA를 밀수입했다는 논란이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호암은 억울했다. 현장담당 사원의 부주의로 OTSA가 당국 허가 없이 처분된 사실이 드러나 벌금형으로 이미 마무리된 사안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뒤 갑작스레 여론화됐다. 이미 수사가 종결된 사안이었지만 검찰은 '일사부재리' 원칙까지 어겨가면서 수사를 재개, 호암의 차남 창희 씨 등을 구속했다.
"삼성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비사건에는 정치인의 공작이 숨어 있었다. 그 진상이 밝혀질 날이 있을 것이다." (호암자전 중에서)
엄청난 돈을 밀어 넣었던 한국비료였지만 그는 위기를 정면으로 헤쳐나갔다. 호암은 한국비료 공장을 완공한 직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파란 많았던 내 생애에서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었다.(호암 탄생 100주년 기념 평전 '담담여수'(淡淡如水) 중에서). 한비 사건으로 입은 호암의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엎친 데 덮쳤다. 전적으로 신임했던 한 간부사원이 한비 사건으로 삼성이 파산위기에 놓였다고 판단, 당시 삼성 자산의 3분의 1을 횡령했다. 이후 회수하긴 했지만 직원들을 믿었던 호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한 번도 (사업에) 실패한 적이 없는 줄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다만 젊었을 때 치른 실패의 체험을 나는 값진 교훈으로 돌리고 있다. 물이 늘고 파도가 거칠어지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 대신 배는 그만큼 높이 올라앉는다." (호암어록 중에서)
호암은 수많은 좌절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그 결과는 오늘의 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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