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를 산 지식인들 중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제의 유혹과 회유가 집요한데다 가족이나 친지들이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면 전향한 자들의 심중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대놓고 친일을 한 사람들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이가 1872년 오늘 태어난 박중양(1872~1959)이다. 어릴 때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 대한제국의 관료가 됐고, 러일 전쟁 시기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종군하면서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언변으로 조선총독부의 신뢰를 얻었다. 그의 행적 중 대구와 가장 관련 있는 것은 1906년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로 있으면서 대구읍성을 철거한 일이다.
광복 후 친일파로 몰려 1949년 1월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체포되어 반민특위에 기소됐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만년에는 대구 오봉산 근처에 은거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존경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이승만과 이시영, 함태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수시로 비방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뼛속까지 친일파였다. 오늘날 대구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인물 중 대표 주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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