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21)삼국시대 대구에 성형수술이?

돌로 눌러 머리 형태 바꾼 성산리 여인…미용? 관습?

화원 성산리 고분에서는 머리를 인위적으로
화원 성산리 고분에서는 머리를 인위적으로 '짱구'로 만드는 편두 유적이 발굴돼 학계의 관심을 끈 바 있다. 1979년 성산리 고분군 1호분 발굴 모습. 경북대박물관 제공

미(美)는 선(善), 추(醜)는 악(惡)?

추함이 죄악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류를 어느 정도 불편하게 하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미의 기준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 병자가 되고 근사한 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새 환자가 되어버렸다. 낮은 코, 돌출된 구강, 네모 턱, 빈약한 가슴은 '질병'으로 분류돼 의사의 치료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말이다.

역사 이래 아름다워지기 위한 인류의 노력도 항상 함께 있었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고대의 유적이나 기록에서 벌써 성형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물론 메스 수술이나 정형(整形) 시술은 아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들의 미라는 왕이 생전에 남긴 유언에 의해 얼굴을 성형했다. 아마도 시신의 얼굴에서나마 젊은 시절을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인도에서 범죄자들은 코를 베어 단죄함으로써 사회 규율을 유지했다.

때론 아름다워지기 위한 인류의 본성으로, 때론 끔찍한 비문명 행위로 저질러지기도 한 성형, 놀랍게도 지역 대구의 유적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삼국시대 성형의 흔적을 찾아 화원 성산리(화원 동산)로 떠나보자.

◆고대사회의 성형 흔적 문신, 발치='삼국지' 애독자라면 관우의 독화살 치료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외과적 수술에서 소독, 봉합까지 성형수술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명의 화타(華陀)에 의해 집도된 이 장면은 관우의 위엄과 용맹을 높이는 소재가 되었다.

관우의 사례에서 보듯 고대 성형은 전투나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로마시대의 검투사들은 싸움이 끝난 후 상처를 치료받으려고 의사를 찾았다. 마취약이 개발되기 전이니 생살을 째고 상처를 깁는 수술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이제 무대를 한반도로 옮겨 보자. 고대 사회에서 성형에 대한 기록은 주로 문신(文身)이나 발치(拔齒)에서 많이 나타난다. 문신은 종족 결속의 징표, 주술 또는 미용 목적으로 주로 시술했고 발치는 성인식이나 결혼식 같은 통과의례나 장례의식에서 애도 표현의 수단으로 행해졌다. 드물지만, 두상을 인위적으로 짱구로 만드는 편두도 일부 지역에서 나타났다.

◆김해 예안리 고분서 편두 인골 출토=삼한시대 역사를 기록한 중국 사서 '삼국지'에 마한(馬韓)의 남자들은 몸에 문신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 성형과 관련한 최초 기록일 것이다. 문신은 고대문화의 전래 과정에서 전파된 남방문화의 한 갈래로 이해되며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문화 현상이다.

한국에서 성형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자료가 가야의 '편두'에 관한 기록이다. 편두란 두상을 일부러 변형시켜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요즘에 아기의 예쁜 두상을 위해 머리를 돌려 재우거나 이리저리 만져주는 풍습과 닿아있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에 '가야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눌러 편두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 실례다. 유아의 머리를 돌로? 끔찍한 습속에 섬뜩해지지만 분명한 사실(史實)이다.

사서 속에서 텍스트로 존재하던 기록이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실제로 확인되었다. 1976년 부산대박물관은 김해 예안리에서 총 182기의 고분을 발굴했다. 4~7세기에 조성된 이 무덤에선 모두 190여 구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이 중 4세기 분묘 10구에서 편두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4세기면 가야시대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삼국지'에서 '진한인(辰韓人)은 모두 편두'라고 기술한 부분과도 시기(가야)나 지리적(진변한)으로 일치한다. 이 발굴 이후 학계에서는 고대 성형과 편두에 대한 연구의 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대구 성산리 고분에서도 편두 유골 발견=김해 예안리 발굴 3년 후 대구 화원에서도 편두 유적이 발굴됐다. 1999년 경북대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화원 성산리 고분에선 모두 19구의 인골이 발견됐다. 분묘는 4, 5세기 삼국시대 초기에 축조된 것이었다. 편두 유골이 발견된 곳은 서3호 묘.

당시 인골 학술조사에 참가했던 동아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김재현 교수는 "유골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며 "쑥 들어간 이마, 돌출된 코, 둔각으로 펼쳐진 턱뼈 각도 등으로 볼 때 전형적인 편두였다"고 술회했다.

김해에 이어 대구에서도 편두 유적이 확인됨으로써 '삼국지' 위지 기록의 정확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대구에 고대 성형 문화를 처음으로 알린 성산리 편두 여인을 들여다보자. 그녀는 152.4㎝의 신장에 아담한 체구, 자그마한 두상의 소유자였다. 검사결과 피장자는 출산력이 있는 숙년(熟年)으로 조사됐다. 신분을 추적할 때 기혼, 미혼 여부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안리의 주인공이 출산 흔적이 없어 무녀(巫女)나 여사제 신분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점과 좋은 대조가 된다.

이 여인에게서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됐다. 바로 복상발치(服喪拔齒) 흔적이다. 복상발치는 또 다른 형태의 성형일 뿐 아니라 장례 풍습, 성인식 등 의례의 일부여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고대의 상례(喪禮)에서 사망자 애도의 한 형태로 치아를 뽑거나 성인식에서 통과의례로 발치가 행해지기도 했다.

◆아직도 베일에 싸인 편두 목적=4, 5세기 대구의 한 부락에서 있었던 놀라운 성형 의식. 현재로서는 편두 주인공들의 신분이나 성형 이유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발굴 사례가 단 1건에 그치고 김해처럼 표본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유아기 때 편두 풍습이 행해진 걸로 봐서는 미용이나 성형 목적은 아닌 듯하고 공동체 의례나 관습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하지만, 구성원 전체가 아닌 일부에게만 시술되었다는 점에서 그 부분도 명확지 않다.

현대적 의미의 성형은 대부분 자발적이고 효과도 충분히 긍정적이다. 치료를 위한 시술도 많이 행해진다. 현대인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자상(刺傷)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의 성형은 가학적이고 강제적이며 미용에서도 많이 벗어나 있다. 때론 생명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어쨌든 두 풍습 사이에는 1천500년 시차가 존재하고 두 문화의 간극을 좁히기에는 시공(時空) 간 격차가 너무 크다. 의식이나 사고 체계를 '성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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