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어느 날, 언덕배기에 있는 교회 마당. 팔순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종이컵 하나를 들고 뙤약볕 속을 걸어오고 있었다. 흡사 아기들이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아장아장 걷는다. 혹여 종이컵에 든 내용물이 넘칠세라 조심 또 조심하며 걷는다. 할아버지 손에 든 것은 믹스커피 한 잔.
그 모습을 저쪽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할머니였다. 할아버지가 행여 넘어질까 봐 신경을 쓰는 눈치가 역력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선뜻 맞으러 나가지 않고 그냥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다. "점심 먹고 '커피 한잔 하고 싶네'라고 했을 뿐인데 영감이 기어이 한잔을 빼 오네요. 오늘따라 커피가 더 달 것 같아요. 호호호…."
할아버지는 힘들게 가져온 종이컵을 할머니에게 내밀고는 "자, 마셔. 설탕 아닌 믹스라고 했지. 뜨거워 조심해서 마셔." 커피를 받아든 할머니는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맛있네. 당신이 가져다주니 커피가 더 맛있는 것 같아." 그제야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인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어요. 항상 자신 먼저 챙기고 난 뒷전이었죠. 근데 언제부턴가 나를 챙기네요.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돼 보이기도 해요."
맛있게 커피를 다 마신 할머니는 일어서며 말했다. "자, 갑시다. 걸을 수 있겠어요?"
할머니가 앞장섰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뒤를 따른다. 자세가 꼿꼿한 할아버지보다 등이 굽은 할머니 걸음걸이가 더 가볍다. 살짝살짝 힘들지 않게 걷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도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옮겨 놓는다. 저만치 가는 할머니를 따라가고 싶지만 따라갈 수가 없다. "어이 와요." 앞서가던 할머니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성격이 급한 아버지는 걸음걸이가 빨랐다. 아버지에 비해 성격이 느긋한 어머니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아버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두 분이 다정하게 보폭을 맞춰 걸어가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는 정말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어머니께 보여주고야 말았다. 위암에 걸린 아버지는 더 이상 다른 사람 힘을 의지하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걸을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자주 화를 내셨다. 누구에게 내는 화가 아니었다. 당신 자신에게 내는 화였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모든 역정을 들어주었다.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필자 역시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걸음걸이가 좀 빠른 편이다.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영 엄마, 우리 팔짱 끼고 걸을까?" 아내가 말했다. "에끼, 여보시오. 이 나이에 무슨 팔짱, 더워요 더워." 부부는 이렇게 사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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