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필리핀 마닐라 외곽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이 있는 빠야따스 지역에 의과대 학생들과 1주일간 해외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마닐라 국제공항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다음 날 아침 일찍 필리핀의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를 타고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형성된 골목들을 지나 진료소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빠야따스 풍경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쓰레기 산 속에서 주민들은 쓰레기를 뒤져 생활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했고, 기본적인 상하수도 시설이나 의료시설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밀려오는 환자들 대부분은 수인성 질환이나 피부질환 환자였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환자들이다. 특히 아이들을 위한 교육 및 보건 환경은 최악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이곳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마닐라 중심가는 현대적인 화려한 대도시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높은 경제 수준을 유지했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모델이었다. 그랬던 국가가 극심한 빈부 격차에 수십만 명의 국민이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는 나라로 전락해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근대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는 '사회 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런데도 여러 곳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했다. 루소는 사회 부조리와 잘못된 정치형태를 원인으로 꼽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지력, 체력, 경제력, 기술력 등 모든 면에서 주변 민족보다 열세였던 로마인이 지중해 전역과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1천 년 넘게 경영한 비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로마 평민들에게 '시민정신'이 있었다면 귀족들에게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었다. 로마는 외국인을 적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얼마든지 자신들의 울타리 안으로 받아들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온 국민은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위공직자의 국회 청문회에서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사회에 대한 책임 공방으로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그리고 각 이해 집단들은 법질서나 공익보다는 개인이나 집단이기주의를 우선시하며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빚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살기가 힘들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지금의 사회적 혼란을 극복할 해법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사회지도층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사회에 대한 책무를 다하고 국민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법질서를 지킴으로써 현재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고석봉 대구가톨릭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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