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장 길을 따라 산모롱이 몇 개를 더 돌자 저 아래 숲 사이로 오지 산속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마을이 보인다. 마을 뒤로는 커다란 벌판이 펼쳐지고 그 가운데로 널따란 강줄기가 갈지(之)자로 흘러간다. 태고의 시절 원숭이를 닮은 무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빙 둘러싸인 산에서는 사철 과일까지 풍부하게 나오니 가히 살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그 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고 이렇듯 큰 마을로 번성했을 것이다. 길옆으로 깊은 골짜기가 있고 그 아래로도 마을이 있다.
삼거리가 나오고 입구에 오바또가 하나 있다. '빵흰뽄 몽족 마을'이다. 나란히 가게가 두 개 붙어 있고 몽족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서넛 보인다. 앞에 있는 미니 트럭에는 지금 도시로 나가려는지 차가 휘어지도록 양배추가 실려 있다. 흙빛이 선명한 땅콩을 사 입에 넣으니 착 달라붙듯 맛이 감기는데, 쭈글쭈글한 밀감은 영 질기다.
마을 길에 들어서니 양쪽으로 들판이 펼쳐지고 곡식들은 아직 푸른빛이 선명하다. 쿤멜라노이에서 넘어오던 숱한 깔리양 마을들은 탈곡까지 다 마쳤던데, 오지 산속이라 기온도 다른 모양이다. 가파른 산기슭을 따라 널따랗게 펼쳐진 옥수수밭, 바람이 불 때마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산등성이를 넘어간다. 그 사이로 어머니의 가르마처럼 사라지는 길들. 수십만 명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던 것 같던 그 푸르던 옥수수들이, 이제 물기 빠진 어머니의 삭신처럼 푸석거린다. 군데군데 옥수수 터는 기계 소리가 요란하고 산비탈마다 허옇게 날려온 꺼풀들이 작은 구릉처럼 쌓여 있다.
◆매쳄 마을
마을에 도착하면 전화하라던, 이곳에서 십여 년 목회를 한다던 한국 목사님은 치앙마이 공항에 손님 맞으러 나갔단다. 대학생 한 명이 이곳으로 봉사하러 와 120여 명의 산골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인근의 주도인 '매홍손'보다 더 큰 느낌이 드는 오지 산마을, 널따란 옥토에서 그만큼 물산이 풍부하여 경제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곳들보다 물가도 더 비싼 듯하다. 국숫집에서 게스트하우스를 물으니 여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데리러 왔다. 북부 지방의 전통 란나 건축물을 약간 개조한 듯한 목조 건물, 샤워실도 없이 천장에는 선풍기 하나 외롭게 빙빙 돌아가는데 350바트(1만4천원)란다.
도시의 번화가는 휘황하다. '로이 끄라통' 전야를 맞아 3개의 나이트 바자가 난장에 펼쳐져 있고 음악소리, 상인들 호객 소리가 요란하다. 길 양편으로 형형색색의 형광등을 길게 붙여 두었다. 번화가 중앙쯤에 환하게 불을 켜놓은 세븐일레븐 앞에는 인근 마을의 청춘 남녀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몰려나와 빽빽하다. 아마도 만남의 장소인 듯하다. 캔맥주를 마시며 뿜어내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음악 소리와 섞여 요란하다.
조그만 차 두 대에 엄청난 앰프 시설과 조명까지 휘황하다. 얼마나 소리가 큰지 차 바퀴까지 들썩거리는데, 캔맥주를 마시며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어느 도시에선가 나이트 바자에서 '강남스타일'에 맞춰 춤을 추었던 기억이 난다. 이 마을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서양인도, 필리핀 청년도 함께 섞여 있다.
평소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는 듯한 널따란 광장에는 호프 난장이 펼쳐졌다. 산골 오지 마을 오바또에서 만났던 깔리양족 청년들인 조, 쏨싹, 보스, 위라윳, 샤또이가 앉아 불콰하게 취해 있다. 그들은 대부분 4년 계약직이다. 5명에 불과한 정식 직원들이 깔리양족들의 토속어를 모르고, 또 이국에서 넘어온 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 고용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행사에 쓰이는 모든 장비도 빌려주고 가끔 노인들에게 약간의 생활비도 지급한다. 조가 커다란 비닐 컵에 얼음과 생맥주를 가득 채워 건넨다. 그는 항상 이국인인 나에게 살갑게 대해 주어 고맙다. 커다란 무대 위에는 '란나' 시대 전통 복장을 한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춤을 추고, 그 뒤로는 각기 다른 악기들을 든 젊은이들이 길게 서서 연주를 한다. 다른 쪽에서는 빨간색과 노란색이 유난히 도드라진 풍선들을 가지런히 세워놓고 터뜨리기 오락을 한다. 우리의 난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인형을 탄 젊은이들이 서너 명 서 있고 나도 세 개를 탔다.
세븐일레븐 앞 난장에서 치킨과 찰밥에 맥주를 마시려고 하니 배려심 많은 주인이 자리를 깔아주며 유리컵을 가져다준다. 그 마음 씀씀이에 여행자의 피로가 풀리는 듯하다. 등이 깊게 팬 원피스를 입고 설레발을 치는 여자 하나, 게이다. 좌판마다 온갖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한국 글씨가 선명한 예쁜 자물쇠가 25바트(1천원)인데, 중국산인 듯하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사람들은 돌아갈 줄 모르고 이국인도 낯선 거리를 배회하며 오지 마을의 밤은 깊어간다.
성소는 어디에 있는가/ 지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그 마음의 성소를 찾아/ 순례하는 사람들
올려다 본 하늘/ 별들만/ 까치밥으로 걸려/ 화흔처럼 박혔는데
어둠은 하나 둘 능선을 지우며/ 먹빛으로 짙어 가는 첩첩 산중
사람들은 달빛 아래/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천 년 전의 밤은/ 오늘도 깊어간다
-마음의 성소(聖所)/윤재훈
윤재훈(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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