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명조(鳴噪)

계절 변화를 눈치 챌 수 있는 가장 예민한 감각 중 하나가 소리다. 어쩌면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보다 소리로 먼저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도 있다. 개구리와 매미의 울음에서 여름을 직감하고, 맑고 구성진 귀뚜라미 소리에서 사람들은 가을을 짐작한다. 옛 사람들이 개구리와 매미 소리를 여럿이 모여 시끄럽고 쓸모가 없다는 비유로 '와명선조'(蛙鳴蟬噪)라고 표현했지만 만일 이런 소리가 없다면 자연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신사임당의 8폭 병풍 그림인 '초충도'에는 나비와 귀뚜라미, 수박, 패랭이꽃 등이 등장한다. 5천 원권 지폐 뒷면에 보이는 그림이다. 이를 눈여겨보면 한 폭의 그림에 여러 계절이 동시에 표현돼 매우 어색하다. 하지만 제재의 상징이라는 문인화의 독화(讀畵)적 요소를 감안해 찬찬히 그림을 뜯어보면 갖가지 표현의 의미가 명확히 드러난다. 문인화는 읽어야 그 의미가 전달되는 독특한 회화 구조를 갖고 있다.

문인화의 단골격인 귀뚜라미는 한자어로 '괵아'(蟈兒)다. 괵은 원래 청개구리나 여치를 일컫는 글자이지만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빗대 괵아라고 이름했다. 관아(官衙)와 괵아의 읽는 소리가 비슷해 문인화에서 귀뚜라미는 벼슬자리를 뜻한다. 씨가 많은 수박이나 난초, 오이와 같은 덩굴 식물은 다산과 자손만대를 뜻하고 등이 굽었다 해서 해로(海老)라 불리는 새우는 부부의 해로(偕老), 갑각에 싸인 게는 첫째 갑(甲)의 뜻으로 장원급제하라는 뜻이다.

우리 조상들은 '귀돌 귀돌'로 들리는 울음소리에 작고 귀엽다는 뜻의 접미사 '아미'를 붙여 귀돌아미(귀뚜라미)라고 했다. 한자권에서 귀뚜라미를 이르는 대표적인 명칭은 '실솔'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날이 곧 추워지니 빨리 베를 짜라고 재촉하듯 우는 곤충이라는 의미에서 '촉직'(促織)이라고도 불렀다.

귀뚜라미 소리가 깊어가는 가을이다. 사흘 뒤면 절기상 흰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이자 한가위다. 시절은 촉직하라고 보채는데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벌어지는 여야의 극한 대립과 국회의 체포동의안 부결, 갖가지 재해와 사고, 추문으로 오롯이 가을을 느낄 겨를이 없다. 지금 우리의 처지와 상황이 '명조'(鳴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누구 탓인가. 올가을 귀뚜라미 소리가 처량하게 들리는 것도 명조가 깊어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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