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동안 처가에 가는 중이었다. 막 북대구 톨게이트에 들어서는 순간 앞에 보이는 야산에 세워진 커다란 간판의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늘 다니는 곳이었고 그곳에 무언가가 쓰여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던 곳인데 그날따라 글자를 또박또박 새겨 읽었다.
'푸른 대구 밝은 미래/ 세계 속의 패션 대구'. 아! 저 간판은 언제부터 저곳에 서 있었을까? 너무나 익숙해서 그 기원을 짐작할 수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의 은행나무처럼 간판은 그곳에 내내 서 있었던 것 같았다.
간판은 밀라노 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있다. '패션 대구'라는 용어는 밀라노 프로젝트의 슬로건이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IMF)의 늪에 빠져들어 가고 있을 때 밀라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간판은 그 내용의 연원만을 두고 볼 때 지난 10여 년 이상 대구 경제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 저 간판은 언제까지 저곳에 서 있을까? 밀라노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가 관건이다. 그러면 다음의 질문은 필연적이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성공하였는가, 혹은 실패하였는가?
대답은 언제나 모호하다. 언제부터인가 대구 경제계는 밀라노 프로젝트의 평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모호한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문제는 그 모호함이 밀라노 프로젝트의 평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구 경제계의 지배적인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대구의 관문에 만방으로 보이는 곳에 서 있는 '패션 대구'의 간판은 대구 경제계의 모호함을 민낯으로 드러내 보이는 상징이다.
북대구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동대구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혁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그곳에는 지금 '메디시티 대구'의 깃발이 드높게 휘날리고 있다. 한때 '패션 도시'가 내뿜는 기세도 저러하지 않았던가? 또 다른 팡파르가 준비되고 있다. 남부권 신공항 건설이다. 남부권 신공항이 건설되면 대구는 세계로 나가는 하늘길이 열려서 그동안 내륙도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대구는 '국제지식산업도시'로 발전할 미래의 교두보가 확보된다. 현재의 클라이맥스는 삼성발 대박 뉴스다. 지난 월요일 대구시와 삼성은 업무협약을 맺고 상호협력 방안을 모색하기로 약속하였다. 대구는 삼성이 창업한 곳으로 '삼성 도시'의 연고성을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권영진 시장이 내건 '창조경제 메카'의 비전도 확고하게 승인되어 한껏 달뜬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단호한 결기를 담고 있지만 순수하기 짝이 없는 다양한 수식어가 대구의 미래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대량의 국비가 수반되는 정부의 사업 꼭지나 혹은 담대한 사업 계획이 발표될 때마다 대구를 규정하는 수식어가 새롭게 제안되어 보태어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대구 경제의 모호함은 이렇게 빌려 온 수많은 수식어가 상호 간 계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인 수식어가 꿈꾸고 있는 형형색색의 미래 도시 비전을 내부에서 끊임없이 단색화하고 퇴행화시키는 계산된 오독(誤讀)의 습성이 대구 경제의 모호함의 근원이다.
줄탁동기(啐啄同機)라는 말이 있다. 계란 속의 병아리가 부화되기 위해서는 병아리가 안에서 쪼아야 하고(줄), 동시에 바깥에서 암탉의 단단한 부리로 쪼아주는(탁) 절묘한 타이밍에 생명이 탄생한다는 의미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줄탁동기의 결정적인 순간이 도달하기 전에 이미 계란 내부에서 준비된 내발적 생명의 계기다. 활발한 세포 분열을 통해 생명 탄생의 전사(前史)가 완성되고 난 후 줄탁동기는 비로소 가능하다. 대구가 그동안 새로운 도약에 실패한 것은 외부의 충격이 부족하고 혹은 약했던 것이 아니라, 도시 내부의 내발적 동인에 의한 치열한 생명의 전사가 준비되지 않았던 탓이 대부분이다.
민선 6기 대구시는 '변화와 혁신'을 시정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외부에서 변화의 바람이 순풍으로 불어오고 있다. 문제는 내부 혁신이다. 대구 경제계가 그동안 오랫동안 안주해 온 게임의 룰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내발적 성장론의 요체다. '패션 대구'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정리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김영철/계명대 교수·경제금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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