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이 비행기를 놓친 적이 있었다. 탑승구 앞에 한 시간 먼저 도착해 기다리면서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다가 눈앞에서 비행기를 떠나보냈다. 2009년 홍콩국제공항에서 생긴 일이었다. 내가 산 티켓은 방콕에서 출발해 홍콩을 거쳐 인천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직항을 타면 방콕에서 인천까지 5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그때 나는 경유 비행기를 타야 할 만큼 시간만 많고 돈은 없는 대학생이었다. 홍콩 국적의 C항공사에 찾아가 "비행기를 놓쳤다"고 울상을 짓자 그곳 직원은 "일단 기다리라"는 말만 했다. 이 말만 믿고 공항에서 30시간 넘게 노숙했다.
100% 내 잘못이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 현재 상황을 설명하려고 열흘 만에 처음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은 뒤 공중전화 앞에 주저앉아 부끄러움을 잊고 펑펑 울었다. 3일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즐겁게 여행이나 한 나는 나쁜 손녀딸이었다. 느긋했던 마음이 조급해졌다.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항공사를 찾아가 티켓을 빨리 달라고 재촉하자 항공사 직원은 "비행기를 놓친 건 네 잘못이야. 급하면 돈 내고 다시 표를 사라"고 쌀쌀맞게 말했다. 동정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쁜 것들. "다시는 이 비행기 안 탄다"며 영어로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을 한 뒤 맞은 편 대한항공으로 달려갔다.
세상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홍콩발 인천행 비행기 표 값은 약 50만 원. 비상용으로 들고갔던 카드는 무용지물이었고, 지갑에 있는 돈은 태국 바트화 몇 장이 전부였다. 집에서 계좌이체로 돈을 보내준다고 해도 이 돈을 출금할 수 있는 카드가 없었다. 모든 일이 내 손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항 기도실로 갔다. 그리고 나의 신에게 빨리 집에 보내달라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기적은 있었다. 대한항공 카운터를 서성이다가 나처럼 C항공의 인천행 비행기를 놓친 한국인 남성을 우연히 만났다. 말레이시아에 파견 근무 중인 H기업의 직원이었다. 비행기 탑승 한 시간을 앞두고 눈물로 그를 설득했다. 저가 항공권의 함정에 빠진 불쌍한 대학생의 처지와 할아버지의 죽음, 한국에 가자마자 50만원을 계좌로 송금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애원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가 말했다. "꼭 갚으셔야 해요." 그리고 자신의 카드로 내 항공권을 결제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이 미쳤다"고 말한다. 맞다. 요즘은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도 믿기 힘든 시대다. 그 남성은 처음 만난 나를 신뢰해서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속는 셈치고 세상을 한 번 믿어본 것이다. 만약 외국에서 만난 한국인 대학생이 비행기를 놓쳤다고 애원한다면 나는 50만원을 선뜻 빌려줄 수 있을까. 세상에 진 빚이 있으니 나도 세상을 한 번 믿어봐야겠다. 단, 50만원 이상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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